세계

유럽의 대안인 아시아와 주변국의 한계

두 아들 아빠 2006. 7. 8. 19:12
 

세계의 주류는 이제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 서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다.

 

중국은 경제는 자본주의를 따르고 통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런 어정쩡함은 언젠가 이를 정리 할 사회 변혁이 일어 날것이다. 그 두 가지가 공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평등을 요구하지만 자본주의는 평등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민의 의식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 두개의 모순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모두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정신이 빠져있지만 부를 축적한 사람은 좀 더 자유로움을 찾고, 부에서 제외된 사람은 사회적 모순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변혁은 시간문제이다.


인도를 무섭게 떠오르는 IT 세계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을 신분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인도의 서민은 이를 타파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인도인 특유의 운명론적 사고가 사회개혁의 의지를 박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류층이 자기들 이권을 스스로 내려놓은 일은 인류 역사상 없었기에 기대 할 수 없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 되지만 이를 타파 할 변혁은 중국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될 것이다.

국가의 힘은 국민 전체에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중국과 인도의 발전은 한계가 있다.


이들 두 나라는 우리와 동반자적인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발전 할 수 있는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일찌감치 서양에 문호를 개방 했지만 서양의 정신과 의식은 자신들의 아주 촘촘한 체로 걸러내고 그들의 외적인 힘만 유입한 것이다. 아주 경제적인 방식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문명은 그 의식과 함께 녹아나야 한다. 외적인 것만 흉내 내서는 문명의 진정한 유입 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닛뽄은 허전하다.


힘은 누구 못지않은데 뭔가 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일전에 고이즈미가 미국을 방문하여 엘비스의 생가에서 부시를 앞에 두고 원숭이 춤을 추며 아양을 떤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중문화 중에서도 질 낮은 것만 받아드리는 아주 천박한 족속이다.

이를 채우는 방법으로 힘은 자기보다 세고, 의식은 좀 더 나은 미국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 내각제라서 마치 선진 민주주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부시대의 영주끼리 모여서 지배하는 구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파워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마쓰시다 정경숙’을 정치지도자인 영주를 길러 내는 곳이라면, 동경대는 영주 밑에서 실무를 보는 관료를 길러 내는 곳이다.

평상시에도 칼을 차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무라이는 거리에 버젓이 간판을 걸어 놓는 깡패 야쿠자로 변신했다. 이게 일본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엘리트 양성소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넋 빠진 인간들이 있다. 친일파가 아니라면 그들의 머리 구조까지 닮아가려는 인간들이다.


일본이 야구강국이라고 하지만 이는 부자집 아이가 보이스카우트에서 로프 매듭법을 배워 와선 짚으로 새끼를 순식간에 몇 타래 꼬는 촌놈 앞에서 자랑을 하는 수준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의 축구가 왜 그 모양인가?


한반도의 어려움은 정신과 의식이 전혀 다른 이웃인 일본이 있어서다.

그들은 불교도 기독교도 그저 모양만 있을 뿐이다. 일본의 정신세계 수준은 아직 야만의 힘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일본은 유럽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아시아 대륙과는 정서적으로 공존하기가 어려운 섬나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