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참여정부의 교육 삼불(三不) 정책

두 아들 아빠 2006. 9. 5. 12:21
   참여정부는 아래 세 가지를 당분간 금지 시키는 교육 정책기조를 국민의 정부 이후 줄곧 유지 해왔다. 이를 끝까지 유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 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아직 사회적인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1.고교 평준화 폐지

2.대학 본고사 부활

3.기여 입학제도

 

반면에 조중동과 유사 사이비 언론, 한나라당과 일부 사학계, 심지어는 기독교 교계까지 이들 모두를 당장 허가해야 한다고 날뛰고 있다. 못된 놈들이 뜻을 같이하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고교 평준화 폐지에 관하여~

  우리나라가 엘리트가 모자라서 문제인가?

중, 고교 평준화는 엘리트 교육을 외쳐왔던 과거 박 정희 시절에 폐지를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초, 중고 학생들의 1/3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부터였다.

명문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서 어린 학생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폐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다시 부활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평준화로 교육의 전체 질이 떨어졌으며 이로 인하여 세계화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차별화로 유능한 인재를 조기에 선발하여 특화 교육을 시키고 좀 떨어지는 학생들은 그 수준에 맞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대고 있다.


애초부터 진정한 수재(秀才)는 제도권의 교육에서 길러 낼 수 없다. 그들은 타고난 기질이 있다. 인류에게 큰 가르침을 주거나 대단한 발명을 한 과학자는 결코 제도권의 교육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우는 거의 없다.

천부적인 능력을 제도권의 교육이 담아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를 기른다는 명목으로 어린학생 전체를 서열화 한다면 애초 뿌리부터 양극화로 가자는 것이다. 이따위 주장을 기독교 사학계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정녕 하나님과 성경을 알기나 하는 작자들인가 의심이 된다.

똑똑한 소수가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 못한 발상이며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짓이다.


세상 적으로도 소수 엘리트주의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소수의 인간이 다수를 지배한다는 봉건영주시대의 귀족주의적 발상이다.

역사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짓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했다.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잡아먹는 쪽에서는 관리가 쉬우며, 약간의 협박을 하면서 그들의 권익만 보장 해주면 나라의 도장을 훔쳐서라도 팔아먹는다.

대중의 의식은 전체적으로 함께 올려져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몇몇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속내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한다.

사탄은 결코 사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는 좋고 나는 힘들게 일한다는 가증함으로 다가오는 소수 엘리트주의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이미 특목고가 있다. 그래서 학업성취도가 월등한 학생들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를 전면적으로 차등화하자는 것은 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대학에서 완성을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학의 입시 제도에만 매달려있는 것은 대학교육의 허접함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


2.대학본고사 부활에 관하여~

  중, 고교를 차등화하고 대학의 학생선발권을 보장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들을 자율적으로 뽑겠다는 의도이나 이도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식이다.

부정입학의 전과를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맞길 수 없다.


일전에 퇴임한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대학의 학생 선발권 자율을 주장하면서 ‘우수한 원자재’론을 들먹였다.

우리나라의 중, 고교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도 세계의 학생들과 견주어서 모두 상위권 안에 든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 수많은 대학은 세계에서 100권 안에도 들지 못한다. 그들이 과연 ‘우수한 원자재’를 주장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들이 저마다 선발기준을 달리하면 학생들은 애초부터 지원하고자 하는 대학의 선발 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교육의 서열화다.

상아탑이라는 거룩하고 높은 망대에서 중, 고교생과 그 부모들이 자기들의 선발 기준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감상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와 교육부의 권력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 누리겠다는 뜻이다.


3.기여 입학제도에 관하여~

  일부 사학들은 돈을 내고 입학하는 것을 허용해야한다고 하는데, 외국의 예를 들어서 대학의 부족한 제원을 충당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의식의 뻔뻔함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다.


부의 축적과 이에 따른 세금을 모두 정당하게 하여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라면 고려 할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 요원한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 돈만 내면 입학을 허가 한다면 또 다른 불공평함을 야기 시키는 것이다.

결국 부의 세습과 돈으로 배움의 독차지를 하겠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미성숙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기여 입학을 한 학생은 학내에서는 꼭 명찰을 달게 하고, 이름아래 기부한 액수를 적도록 한다면 이를 허가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대학이 돈이 없어서 문제인가?

소위 일류 사학이라는 대학은 이제 더 이상 건물을 지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 이는 돈으로 지은 것이지 뭐로 지었다는 것인가?


대학은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대학에서 연공서열은 지식의 착취구조이다. 연구도 논문도 쓰지 않는 실력 없는 교수나 지식을 담아내고 창출할 여력이 떨어진 노회한 교수는 더 이상 강단에 서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들을 걸러 낼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이들의 철밥통을 위해서 대학 강사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여주고 착취를 하는 것이다. 지쳐 나가 떨어 질 때까지 피를 빨다가 또 무궁무진한 다른 젊은 지식인을 선발하면 된다.


대학이 자율적인 학생 선발권을 가지려면 교수 임용에 관한 것은 국가에 내놓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