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가정과 자녀교육

두 아들 아빠 2006. 10. 14. 17:56

-가정-

 

가정의 중요성을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이 세상 단위의 기본은 단연 가정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즉 성부,성신, 성자 하나님의 원형을 인간 세상에 구현한 것이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기 다른 영 이시며, 또 한 몸이다.(이 부분은 신학을 전공한 사람도 헷갈리거나 잘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기에 가정도 각기 다른 인격체이지만 한 몸이다.

온전한 가정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각기 다른 존재이나 자녀가 독립을 하기 전까지는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아버지의 잘못은 온 가정이 남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어머니나, 자녀의 잘못은 당연 남편과 아버지의 잘못과 책임이라고 한다. 법적인 처벌 대상은 아니라도 말이다.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주셨지만 그 원형인 삼위일체 하나님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사랑은 인간의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엮어서 그 안에서 사랑을 구현하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그 안에 온전한 사랑은 없다. 인간의 죄 된 본성으로는 이를 시현 할 방법이 없다.

 

가정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간의 완벽한 사랑보다는 정반대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성부 하나님에 비유되는 남편인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권력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성신 하나님인 아내와 어머니는 남자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명을 돕는 배필인데, (돕는 배필이라면 오늘날 패미니스트와 여성들은 반감을 지닐 수 있다. 남편은 머리이고 여성은 심장이라면 이해 가 될 것이다.) 남편을 주장하려 하며, 값없이 주던 자녀사랑에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성자인 아들은 부모의 뜻을 받들어서 그 뜻을 더욱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유익을 취하거나, 모반을 꾀한다.

 

이렇듯 원래의 목적과, 사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증거이다. 이런 가정에서는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만 있다. 

유행가 가락에 제아무리 사랑을 떠들어 봐도 알 수없는 것이 사랑이다.

 

혼수 준비는 열나게 해도,(본인의 의지나, 시댁의 간섭으로 '열나게' 라고, 했는데 꼼꼼히로 바꾸어도 됍니다.)막상 혼인을 왜 하냐고 하면 선뜻 대답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고작, 행복하기 위해서, 나를 사랑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네가 그를(그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정도이다. '행복'이 뭔지도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무식해 보이지만 솔직한 표현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잘'도 잘 모른다. 그래서 '잘'이다.

개념은 없지만 솔직하고 좀 고상한 표현은 "그와(그녀)와 저녁마다 해어지는 것이 싫어서" 가 나은 것 같다.

 

신이 인간에게 사랑을 쥐어 줄 때, 그 본질에 관하여는 설명 해 주지 않아서 인간들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인 상상인데, 최초 인간인 아담에게 하나님이 여자인 하와를 취할 실 때 아담이 자고 있을 때여서 사랑을 모르지 않나 싶다. 대신에 남자들에게 여자에 대한 신비감을 주신 것 같다.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취한 이유는 명확하다. 둘이지만 한 몸으로 살라는 것이다.

더 명확한 것은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행복도 없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혼인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 해 본적이 있는가?

철학자들은 이에 관한 답을 구하려고 오랜 세월 발버둥을 쳤지만 어느 누구도 규명하지 못했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명확하게 말한다.

 

이런 것에 관한 전반적인 개념이 없이, 그저 서로 사랑한다고 혼인을 해봤자 얼마가지 못한다. 애로스 사랑은 하는 시기도 정해져 있지만, 유효기간도 있다.

연애와 신혼 때의 사랑이 식었거나, 변했다고 투덜거리는 여성들은 잘 들어야 한다. 아마도 그 사랑이 유효기간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사태가 일어 날 수 있다. 우선 자녀들 낳겠는가? 낳더라도 정녕 희생적인 사랑을 자녀에게 줄 수 있을까?

자기들끼리 유효기간이 없는 사랑을 나누느라 그럴 턱이 없을 것이다.

 

애로스 사랑은 각기 다른 남녀를 단번에 묶어주려는 의도 밖에는 없는 '일회용 사랑'이다.

유행가 가사가 떠드는 사랑은 거의 가 이 사랑이다.

일회용 사랑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매일 저녁 T.V 연속극에 푹 빠져있는 것이다.

이 사랑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그래도 증상이 가볍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자기중심적인 눈이 멀은 가짜 에로스 사랑을 했던 사람들은 그나마 단 한 번 밖에 없는 사랑을 해보지 못한 안달감으로 평생을 끙끙대며 살기 마련이다.

참 은혜로운 사실은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덜 똑똑하고, 어리버리하고, 되바라지 못한사람도 다 함께 살아 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목적을 성경에서는 분명 말하고 있다.

 

 

-자녀교육-

 

자녀는 '양육의 단계'가 있고, 다음에 '훈육의 단계' 최종적으로 '교육의 단계'가 있다. 이상적인 분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양육'은 어머니가 담당하고 '훈육'은 부모가 같이 하고, '교육'은 아버지의 몫으로 오래 전부터 역할 분담을 해 왔다.

 

오늘날 같이 국가가 전면적으로 교육을 담당한 것은 서양은 300년 남짓이고 우리는 100년 정도 밖에는 안 되었다. 그때도 소수만이 그 해택(?)을 받은 것이다. 가정에서 양육과 훈육 그리고 교육까지 모두 했던 것이다.

이제는 어린아이 양육부터 교육까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었다.

좋은 학원과 과외 선생을 구하는 것이 부모의 능력으로 전락 했다.

교회마저도 처음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기도와 신앙을 주일학교 교사에게 맡기게 되었다. 신앙은 부모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제 모든 교육을 남에게 맡긴 부모는 자녀에게 줄 것이라고는 학비와 급식비, 용돈 등 돈 밖에는 없다. 훈육과 교육의 단계는 점점 없어지고 양육의 단계만 남아 있다.

 

부모의 권위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있지만, 의식의 전달이 진정한 권위이다. 

과연 내 자식에게 어떤 의식의 전달을 해주고 있느냐를 부모세대들은 심각하게 고민 해봐야 한다. 사람이 장수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라고 목사님은 말 하신다. 자녀 세대에게 좀 더 오래도록 의식의 전달(신앙의 계대적인 전수)을 해 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이 자녀에게 베푼 것을 거두려는 마음는 말 할 것도 없이 단연 도적의 마음이다.

 

더구나 장성하여 독립된 가정을 이끄는 자녀에게 어떤 형식이던 자신의 권력을 끼치려는 행위는 죽어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온전한 가정을 바르게 서지 못하게 하는 죄는 아주 큰 죄이다.

 

부모 혼자 힘으로 자녀의 모든 교육을 담당 할 수는 없다. 사회가 복잡해 진 탓도 있지만 이보다는 내공의 부족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열리지 않는 병뚜껑을 온 힘을 다해 열어 보려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열 수 있는데, 내동댕이친다. 거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교회공동체에 모든 것을 열고, 이를 거두지 않으면 온전한 자녀 교육이란 요원 한 것 같다. 

 

일전에 목사님으로부터 자녀 교육에 관하여 심각한 권면을 받은 적이 있다.

부모가 세운 법을 스스로 자꾸 무너트린다는 것이었다. 이게 부모의 권위이자 융통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자녀는 이를 이용하며, 자녀도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부모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을 하며, 더 크면 전면적인 거부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교란도 한다. 이게 불편부당한 부모의 권위로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피하지만 이 나이에 '원칙을 정하면 명분 없이 이를 바꾸면 안 된다'는 자녀 교육관을 알았다.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스스로 내신 법을 당신 마음대로 바꾸시지 않는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다.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기꺼이 십자가가 매달리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