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육을 생각한다.

두 아들 아빠 2006. 11. 29. 19:17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쏟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공부를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 어떤 공부를 하거나 학교에 가면 그것 배워서 뭘 하려 하느냐와 돈 벌이가 얼마나 되는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공부의 목적을 다른 곳에 두어서 공부가 주는 더 큰 유익을 버리고 있는 일입니다.


‘인생이란 사람이 사람을 남기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어떤 사람을 남기냐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관한 책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어 저도 한 때는 이런 책들을 좀 읽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아!~ 그렇구나 하는 내공 있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나면 허탈감이나 좌절감마저 들게 하는 책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독특성과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녀 교육의 표본을 어떤 예를 들어서 설명 해 낼 수 없기 때문입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세상적인 성공만을 담아내고 끝입니다.

그런 다음에 삶을 어떻게 잘 풀어 나갔는가에 관하여는 도통 말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다음에는 더 할 말이 없는가 봅니다.


우선 어떤 사람을 남기느냐 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의 목표가 그저 잘 먹고 잘 사는데 있지 않다고 항변할지 몰라도 사실 여기에 온 집중을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평소의 소신을 댓글로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교육이 제대로 될 일이 없습니다.

공부의 목적이 돈과 명예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공부를 통해서 얻는 ‘의식의 열림’과 ‘고도해짐’의 커다란 유익을 취하지 못하고 그저 한낱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돈을 벌기 위한 기능은 여기에서 말하는 교육과는 다릅니다.

교육은 ‘고도한 의식을 갖춘 인격체’로 키우는 게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은 공부의 목표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선비정신이란 고도한 인격체를 지향하고,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부모 세대만 해도 선비정신을 숭상하여 자갈논 팔아서 우리를 교육 시켰습니다. 선비들의 의식을 높이 산 결과입니다. 선비들은 높은 의식으로 삶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아신 것이죠.

아파트와 자동차, 고급 가구에다, 명품으로 온 몸을 치장하라고 뼈골 빠지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생길 것이라는 상상도 못 하셨죠. 산업화의 열풍이 우리에게 물질의 풍요는 가져다주었지만 인격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언제,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모릅니다.


성경 말씀 중에 진리의 은혜로운 말씀이 많이 있지만, 저자신이 처음 느꼈던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공중에 나는 새도, 들짐승도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부연 설명을 하십니다.

놀고 가만히 있으면 해결된다는 말씀은 아니죠. 게으르면 가난이 도적 같이 찾아온다고 하셨으니 까요. 다만 이것에 열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돈을 주고 사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자 열심을 다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먼저 현실 속에서 이를 저해하는 요인을 말한다면 자녀교육의 패쇄성입니다.

학교를 보내고, 학원도 보내고, 예능학원까지 보내는데 무슨 뜬금없는 패쇄성이냐? 고 반문을 할지 모르지만, 가정 안에서의 패쇄성을 말합니다. 오늘날 부모 중에 “나처럼 해라!” 라고 자녀에게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해당되는 말입니다. 먼저 자신의 가정을 열어야 합니다.


‘집안일은 문지방을 넘지 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대문턱도 아니고 방문턱입니다. 하기야 대가(大家) 집이 아니라면 집 마당도 프라이버시를 확보 할 수 없었겠죠.

이 속담을 가정의 흉이나 치부를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오해를 합니다(남자들은 대게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일로 남에게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피해를 주지 말라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과거 농경 시대에 대가족 제도는 가정을 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웃의 밥숟가락 개수도 알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가정의 패쇄성을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 안에서 절대 권력자입니다. 권력자의 속성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대로 나가기 마련입니다. 자기 혼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어지간 하면 크게 어려움 없이 삽니다. 그러나 자녀를 기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사명이 아닙니다.

절대 권력자가 균형 잡힌 인격이 아니면, 자녀들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의 절정은 보모의 죽음이나, 이혼이라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같이 살아가면서 자기보다 못한 인격체로 키우는 일이 더 심각한 사태입니다.


부모와 형제자매, 가족과 이웃에게 열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이웃에게 다 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극단적인 인격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자기 가정을 온전히 열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마땅한 권면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칭찬을 받으며 올바르게 나아 갈수 있습니다. 그게 교회와 잇대어 사는 삶의 참 자유이자 유익입니다.


다음으로 교육 주체의 혼돈입니다.

오늘날은 가정교육을 완전히 포기한 시대입니다. 그 절정이 기러기 아빠들입니다. 자녀교육을 돈을 주고 남에게 맡기는 일이 너무도 당연시 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제도는 불과 100년을 넘지 못했고 그 당시나, 이전만 해도 극히 소수만이 받았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모두 부모를 통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제도가 대단히 긴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에 삶이 의식주 범주에서 크게 벗어났습니까?

아님 고도한 의식 수준이 생겼습니까?

허리 둘레만 크게 벗어났을 뿐입니다.

교육의 주체는 부모입니다. 이게 훨씬 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사상을 주입시키고 훈련을 통하여 응용과 창작의 단계까지 오르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상당히 종교적 색채가 강합니다. 교육의 근간은 사상의 전수입니다. 부모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제도권 학교의 목적은 국가가 써먹기 위한 사람을 길러 내는 곳입니다.

국가는 개인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 교육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모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동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적절히 제어해야 할 교회마저도 자신들이 어디에 속한지도 모르고 수능 백일기도라는 것을 합니다.


부모는 자녀 교육의 근간이며 주체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예배와 기도도 처음엔 부모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교육을 전부 남에게 맡겨 놓고 집안에서 큰 소리만 치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무언가 뚜렷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자녀의 양육 단계가 지나면 좀 더 이성적인 아버지가 자녀에게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대단한 지식이나 학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 온 것도 대단한 실력입니다. 이를 천천히 보여주면 됩니다.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의(義)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는 개인이 추구한다하여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엘리트위주 교육입니다.

대중의 인식이 고루 높은 사회는 남의 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지 않고, 20년 넘은 아파트를 십억이 간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교육을 많이 받는 자들이 문제를 더 일으키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교육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 가를 늘 살펴야 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