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그늘

두 아들 아빠 2006. 12. 18. 14:33
 아버지는 한없이 넓은 가슴을 제공하여 여름날의 그늘도 되어주지만, 평생 어두운 마음의 그늘로 남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제 밤에 문필이 대단한 어느 여성의 블로그 글을 읽고 이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아버지의 기일 1주년을 보내고 난 소회(素懷)인데 아버지의 사랑을 그녀 특유의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감성 미 넘치는 섬세한 글로 엮어내고 있었다.

애틋한 사부곡(思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글에서 그녀 아버지의 아주 심각하고, 왜곡된 사랑을 보았다.



이 여성은 에로스 사랑을 늘 노래하고, 갈급 하는 글을 쓰길 레 좀 문제가 있다고 지적 했더니, 내버려 두란다. 한동안은 그녀의 블로그를 찾지 않았다가 이번에 그녀가 왜 그런지 확실히 알았다.



막내딸인 여성의 아버지는 인텔리였으며, 본인의 표현으로 몽상가라고 했다. 야만이 판쳤던 지난 세월은 인정 많은 몽상가가 살기에 녹녹치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세상 능력과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점점 탐탁하게 생각지 안했으며 이를 듣고, 보고 자란 딸은 지아비에 대한 상이 서서히 왜곡되어갔다.



세상 삶에 밀려난 몽상가는 딸에게 더 집착을 하였다. 아내에게 주어야할 사랑을 막내 딸에게 준 일이다. 그 정도가 심해서 딸의 온전한 이성교제를 완전히 막아서 사춘기에 느껴야 할 이성에 관하여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게 하였다. 딸의 방에 걸려있는 외국 남자 배우의 사진 판넬마저 내팽겨 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인이 되어서 직장에 다니는 딸의 회사에 출퇴근까지 동행하는 일까지 하였다 한다. 그 여성은 아버지의 행위를 큰 틀 안에서 사랑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속박이었다.

사십이 넘어서도 에로스 사랑을 노래하는 일은 늙어서 홍역을 치루는 일이다.



몽상가는 아내가 어머니와 누이에게 모질게 패대기쳐지는 상황에도 혀를 끌끌 찰 때부터 자신의 삶은 고난의 길로 접어 든 것이다. 아내를 자기 집안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하고도 온전한 삶을 바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는데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남자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고 아내와는 한 몸이라고 분명 가르치고 있다.



영혼을 속박한 대가는 결국 치루고 말았다. 아버지는 사위 감을 소개 했지만 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때는 아버지가 소개 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랬지만, 나이 먹은 딸은 이제 와서 그때의 행동을 자신이 처한 현실에 비추어서 안타깝고, 서글프며, 아버지께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딸과 늘 가까이 있는 어머니가 지아비를 존중하지 않으면, 이를 보고 자란 딸은 앞서 말했지만 이성의 모델인 아버지를 온전하게 평가 할 수 없고, 왜곡된 이성 상이 심어지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와는 전혀 반대인 남성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그녀의 선택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아비를 멸시한 대가는 이렇게 자기 여식을 통해서 바로 되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신이 저질러 놓고는 어렵게 사는 딸에게 그냥 꾹 참고 살라고 한다.

서로에게 앙갚음을 하면서 가정이 온전히 서지 못함은 물론이고 자녀의 삶까지 어렵게 한다.



그녀는 전형적인 막내딸 형이다. 이런 여성은 천부적으로 똑똑하여 어릴 때부터 부모의 기대에 저버리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담배 갑을 찾으면 성냥과 재떨이까지 같이 가져온다. 그래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똑똑한 머리로 공부도 잘하여 성과가 나타나는 성인이 되어서 설령 하나님을 믿어도 기실 자기 자신을 믿고 살게 마련이다. 이게 똑똑한 가독교인이 빠지는 오류이자 어려움이다. 자신의 선택은 언제나 탁월했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이 완전히 무너질 때가 배우자의 선택과 결혼생활이다.



막내딸 형은 자신이 선택은 달리 하였으면서도 막상 살아가면서는 아버지와 남편을 일체화시키는 이중적인 성향이 있다. 한 가정의 권력자인 남편을 아버지처럼 대하다가 속된 말로 박살이 난다. 남편이란 존재는 아버지와는 확연히 다르다. 남편 앞에서 예전처럼 귀여움만 떤다고 인정받을 일이 아니다.


귀여움을 떠는 일은 천박함으로, 싹싹함은 얄미움으로, 똑똑함은 잘 난체나, 되바라짐으로 공격받기 일수 이다. 이렇게 되면 자아의식은 완전히 무너지게 마련이다.

서서히 멍청한 여자가 되가는 것이다. 한 몸인 아내가 멍청하게 되면 그렇게 만든 남편의 삶이 당장 어렵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어려움도 멍청해진 아내에게 뒤집어씌우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멍청해 진 것이 확실하니까.



가정 안에서 절대 권력자인 아버지는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래서 중년이 되어도 아버지에 대한 화두는 그치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면 눈물부터 쏟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있다. 이는 이성적인 대화는 턱없이 부족하고 감성만을 앞세운 아버지들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불효막급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제공한 것이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아직도 엄연히 복음의 위력이 있다. 19세기까지 자식은 일을 부려먹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자녀의 부모에 대한 반항은 다 노여움에서 나온다.



유교의 고도한 의식과 합리주의는 다 떨어 먹고 한참 왜곡된 빌어먹을 효사상이 우리의 새 가정을 얼마나 어렵게 하는가는 새삼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이젠 효에 대한 기준도 없다.

처음에는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다가, 왜 자주 찾아오지 않느냐, 어떻게 알았는지 잘 먹지도 않는 남편의 아침밥을 왜 차려 주지 않느냐, 살림이 왜 그 모양이냐, 남의 집 며느리는 뭐도 해준다, 등등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끝도 없다.



애초에 기준도 없는 효에 맞출 재간이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던 시부모 기분에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쓴다.(이 부분은 나중에 예방법이나 해결책을 따로 논한다. 좀 충격적인 면도 있어서 원하면 개별적으로 전하며, 사실은 영악해진 시엄니들이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예방법은 아내를 부려먹어서 자기 집안에 효도를 시키려는 놈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의가 없는 사회는 이성을 키우지 못한다. 이성을 마비시켜야 반란을 막을 수 있다. 그 대신 감성이 판치는 세상을 만든다. 야만을 누그러트리는 대는 감성의 증폭이 제격이다. 그래야 자신들이 좀 인간적이 된다. 우리의 과거사가 그랬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아버지로부터 이성적인 면은 거의 받지 못하고, 감성과 감정이 뒤 엉켜 눈물과 분노가 뒤범벅인 심성을 물려받아 감정을 감성으로 감싸는 일이 반복되면 심각한 인격이 형성되게 된다.

남성의 경우는 가끔씩 자신도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서 가족을 어렵게 하며, 여성의 경우는 어른이 되어도 지극히 퇴행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정 어른 어머니가 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조차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안쓰러운 엄마가 되고 만다.



남자의 분노는 사회생활에서도 가끔 나오지만 대부분 가정에서 더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사회는 그런 감정의 폭발을 단 한번만 내질러도 가만두지 않는다. 따라서 만만한 게 아내와 가정이다. 자신도 그런 감정의 전달을 늘 가정 안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광적인 분노를 당해본 여성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방어기제’란 팔자 좋은 소리이다. 뇌가 한쪽부터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 더구나 무자비한 폭행까지 당하면 순간적으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인식조차 잃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논리적인 대응은 귀신 씨 나라 까먹는 소리이다. 이를 당해본 여성만이 안다. 이런 분명한 범죄 행위를 용납하는 사회는 ‘야만의 시대’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일찍 남편과 사별한 여성의 수명이 더 하는 사회는 분명 야만의 사회이다.



불로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극복 해가는 과정의 여성들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자신들이 현재 어떤 처지에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가르쳐 주는 곳도 없다. 그저 좋은 음악이나 올리고, 글을 좀 쓰다가는 갑자기 문을 닫고 마치 어린아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이글을 읽은 여성들 중에 나는 이런 처지까지는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일도 아니며, 남성의 경우 이정도 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자부를 한 일도 아니다. 여성을 억압하고 자녀를 잘못 키운 대가는 모두가 동일하게 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징벌은 때론 선별적이지 않으시다. 인간 다수가 저지른 죄악에 관하여는 무차별적이시다. 그게 두렵다.



큰이들이 오늘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다. 아침 6시30분에 깨워 달라고 했다. 이도 착취가 아닌지 생각 해 본다.




정직이정직이http://blog.daum.net/hahaha05Y2006.12.18 09:56

<두아들 아빠>님이 따로 교파를 만드셔서 교주가 되신다면, 저는 분명히 열심히 따를것 같습니다.

(놀리는게 아니고, 진짜입니다.) ㅋㅋㅋ

우찌~ 그리도 어떤문제든 잘도 꼬집어내시고, 적합하게 기독교와 연결을 잘 하시는지요?

(제가 그분의 블로그를 잘 알거든요~)


<두 아들 아빠>님이 큰 교주가 되어서, 이 사회를 확실히 한번 바꿔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게 되네요~ 한국의 유교사상이 잘못된 기독교와 섞여서, 요즘 세대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거든요. 이럴때는 이렇게, 저럴때는 저렇게....





잎싹잎싹http://blog.daum.net/k-storyN2006.12.18 10:27

전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분의 글이 에르스의 감성에 젖어있다면 그 나름대로의 자신을 풀어내는 과정이겠지요.

그것을 누가 뭐라 말할수는 없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옛 날에 받아야 할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란 단정은 지극히 위험한거지요.

아빠님의 글은 일리가 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왜곡되어 표현된 부분들도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먼저 제가 그분을 잘 알지 못하고, 그분의 글을 통해서 왜곡된 아버지상을 알지 못하기에 뭐라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이 글상으로는 무척이나 잘못된 모습으로 비쳐들지만,그것은 아빠님만의 단정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한 분을 지칭해서 쓰는 글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요.

아빠님이 올바른 생각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통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성립하고 다른이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겠지만, 이것은 아닌것 같아요.

한번 숙고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녀마녀http://blog.daum.net/music8880Y2006.12.18 10:54

아빠님 글이 더욱 사실주의 같군요~ ㅎㅎㅎ


문제를 지적하고 파악했으면 대안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우리사회에서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일들이 참 많거든요...말씀대로 누가 알려주지도 않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도 않해주고...글고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윗글에서는 제외)...



까시까시http://blog.daum.net/ggasi67Y2006.12.18 13:12

사람들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합니다.

상황 설정에 따라 해결 가능한 것고 있고, 해결이 불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가치관이라든가 고정관념 등의 정신적인 문제나 개인의 성격 같은 것은 더더욱 바꾸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행이 본인이 본인의 단점을 잘 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무척 어렵습니다.

그리고 해결하기도 힘듭니다.

육체적인 문제는 해결이 비교적 쉬워도 정신적인 문제는 해결도 어렵고, 주위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합니다.

저도 이런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기 때문에 늘 가슴이 아프면서도 딱히 해결 방법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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