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밥을 산다는 일

두 아들 아빠 2007. 1. 23. 00:15

찻값은 두발 앞서고, 밥값은 한발 앞서며, 술값은 한 발 뒤로 빼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바보 같은 말이다. 어떤 경우든 자기가 내야 할 때 내야 한다.

미국의 스타벅스 커피가 대한민국에 상륙하여 이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어느 날 일이 바빠서 혼자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3천5백원짜리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 오후에 은행에 볼일 때문에 여직원이 따라와서는 일을 맡치고 옆 건물에 있는 커피숍(스타벅스)에서 커피 두 잔만 사달라고 했다. 그러마하고 계산대에서 얼마냐고 물으니 만이천원이라고 했다.


사업에 실패하여 지갑에 단돈 만원도 없을 정도로 한동안 궁핍하게 살아 왔다던 지인이, 안정적인 수입이 있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찾아 온 친구에게 밥값을 낼 수 있어서 기뻤고, 끼니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찾아 갈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밥값을 치루는 일이 사람의 관계성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런데 이에 구애 받지 않을 사람들이 이런 눈치를 살피고 살아서 각박하고 치사한 세상이 되었다.


건설현장에서 15년을 넘게 지내오다가 본사 근무를 시작 할 무렵에 난감한 일은 점심 값 계산이었다. 다들 더치페이를 하는데, 시작부터 그렇지 않은 문화에서 젖어 있던 나로서는 한동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건설 현장은 함바라는 식당이 있어서 일일이 식대를 내지 않아도 되고, 밖에서 먹을 때는 늘 선임자가 밥값을 냈다. 이런 구조는 불의한 돈이 많이 흘러 들어오는 집단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본사에 근무한 후에 아래 직원과 점심을 먹을 경우, 근 한 달 반 동안 줄기차게 밥값을 냈는데, 어느 날 직원들이 내게 이제 그만 내라고 한다. 이 녀석들,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그 이후로 각자 계산을 하게 되었다. 텃세 비를 치룬 샘 쳤다.


밥을 사는 사람과 얻어먹는 사람들의 심리를 볼 때. 사는 사람은 작지만 베푼다는 기쁨이 있고, 얻어먹는 사람은 돈에 관한 부담이 없어서 상대에게 고맙고, 따라서 기분이 좋다. 그래야 정상이다. 얻어먹는 사람이 불편하면 사는 사람의 의도가 불량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사기를 당하거나, 돈을 떼이는 일은 가끔 있어도 자기의 정욕을 체우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스스로 남을 위해 크게 도움을 주거나, 아주 선한 행동을 베풀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악한 짓은 일상적으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쌓이게 되면 큰 해악이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저지른 악이 그리 크지 않아서 반성이나 회개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작은 선한 행동이 일상 속에서 쌓이면 아주 큰 선함을 이루는 일이다. 더구나 작은 선함은 스스로 자만감이나 우월감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크게 실족하는 일이 없다. 선한 일을 행함은 하늘이 이를 치부책에 기록하여 후불로 복을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써 직불로 상급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일생을 살아가면서 작은 악도 경계하며, 작은 선함이라도 일상적으로 베풀고 산다면 그럭저럭 크게 잘못되지 않는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억울함 없는 부지런함으로 가족을 열심히 잘 돌보는 것만으로도 큰 상급을 내려주신다.


살만한 사람끼리 주고받음은 배품이 아니다 그저 품앗이 일 뿐이다. 자식도 버리는 세상에서 이도 크게 칭찬 받는 일이 되었지만, 부모 공경이나 형제간에 도움을 주는 행위는 하늘의 상 받을 일도 아니고, 자랑 할 일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자신의 형편이 못되어서 이를 행하지 못하면 스스로 안타까운 일이나, 그렇다고 하늘의 벌 받을 일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타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남에게 지워진 무게만큼 평생 지고 가야한다.


있는 자가 고급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어려운 이웃을 불러들여서 존중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나눈다면 자신도 좋고, 선한 일을 행하는 일이다. 자기 형편에 따라, 어려운 이웃이나, 친지들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이보다 더 큰 부탁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작지만 타인의 조건 없는 선함을 자신의 유익을 더 하는 단초로 아는 사람은 염치없는 사람이다. ‘염치’는 인격을 갖추는데 최하위 필수조건이다. 이런 사람의 구원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붙기다.


기독교를 금욕주의적인 종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어느 면에서는 절제된 삶을 요구하기는 한다. 그러나 금욕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음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나와 다시 만날 일이 거의 없거나, 되돌려 받을 상황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도움을 청한 일이다. 나그네에게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놓고 자기도 같이 먹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내게 찾아오는 나그네를 알아보기는 하는 것인가? 오늘날 나그네가 있기는 한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서 나보다 먼저 죽거나, 나중에 죽을 사람 모두가 나그네며, 자신도 그들에게는 나그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