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이중인격자를 양산하는 교회

두 아들 아빠 2007. 2. 3. 08:20
 

이중인격자를 양산하는 교회

교회를 속인 사람은 세상을 속이는 일은 더 쉽다. 교회를 속여 먹은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큰 힘을 쓰고 있다.


전혀 성경적으로 살지 않다가 교회에 와서는 거룩 모드로 변한다. 초신자가 그런 경우는 한주에 잠시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 그게 참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측면에서는 이해 할 수 있으나, 제법 믿음의 기간이 있는 자가 계속 그렇게 하면 이중인격이 형성 될 수 있다. 특히나 가장이 밖에서 거룩한 척을 해도 가족은 이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 심성이 왜곡 될 수 있다.


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그런 것을 검증하고 바로잡을 여건이 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 자신과 가정을 완전히 열어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자신의 성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 결국은 교회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은사를 받지 못하는 일이다. 설사 고민을 토로해도 그저 ‘기도 하세요’ 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는 헌금만 받아먹고는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는 것이 없는 철면피함이다.

집단의 힘을 이용한 자력구원과 성화됨을 받으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장을 연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약 백 년 전에 기독교의 이런 병리적인 현상을 보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종교란 ‘강박적 신경증에 걸린 집단적인 의식’이라고 했다. 이는 바른 믿음을 비판 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믿음을 가진 자를 정신과의사가 환자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소원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제대로 된 자는 신앙의 자랄수록 인성이 균형감을 갖춘 인격체로 자라야 된다. 그렇지 못하고 이상한 신앙을 하게 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수시로 뒤바뀌는 등 우울증보다 심각한 조울증 증세가 올수 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의식적으로 잠시 신앙생활을 멀리하기도 한다.


한번 맞은 마약을 끊기가 어려워서 다시 찾듯이, 자신의 신앙생활 중에 몇 번 있었던 그 뜨거운 감정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러다 또 넘어지고를 반복하면 그때는 누도도 어찌 할 수 없는 왜곡된 심성이 인이 박히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연약하게 들어오고, 믿음을 자기 노력으로 쌓으려는 데서 오는 한계다.


기독교인 중에 어느 한 순간에 영적인 체험을 했다거나,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 믿음이 완성된 수준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다.

믿음이 자격시험을 보듯이 어느 한 순간에 통과되는 절차가 아니다. 늘 죄안에 거하고 있는 인간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서 점점 더 성화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나마 쌓아 왔던 영적인 훈련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성도를 견인하고 믿음을 보살펴야 할 장로 직분을 얻은 자는 자기 가족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자녀의 이혼 등)직분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장로 직분의 유지는 물론 교회에서도 계속 거들먹거린다. 이런 자와 함께 있으면 점점 이상한 성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