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전 혜린

두 아들 아빠 2007. 2. 16. 18:31
 

전 혜린                                                            애비 전 봉덕


1934년생 평남 순천생 1남7녀 중 맏딸                    1941년 평북 경찰부 보안과장

경기여자 중,고 졸업 1953년                                  1942년 경기 경찰부 수송과장

서울대 법대 1953년 입학       - (18세)                    1949년 헌병대 사령관

독일유학, 카톨릭에 귀의 1955년- (20세)                 1950년 국무총리 비서실장

결혼 1956년                   - (21세)                           1951년 변호사 개업

�헨대 독문과 졸업 1959년     - (24세) 서울대, 이대강사 

성균관대 조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 1964년- (29세)

이혼 1964년                   - (30세)

자살 1965년                    - (31세)                          1969년 대한변호사협회장


번역집으로 〈생의 한가운데〉(1961)·〈데미안〉(1964) 등이 있고, 재독문학가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 유고수필집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가 있으며, 1976년 일기를 간추려서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76)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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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을 좀 먹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한번쯤 전 혜린에 열광하고, 그녀의 삶을 동경 했다.

독문과를 전공한 여성들은 한때 전혜린의 삶을 흠모했다고 보아도 좋다. 학창시절에 그녀의 책을 끼고 다녀야 지성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뒤틀어진 심성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이상한 여성일 뿐이었다.


엘리트출신의 골수 친일파 아버지(전 봉덕 1910~?) 밑에서 소공녀 같이 사육 되 온 그녀의 삶은 죽음으로 이어 질 수밖에 없었다. 1955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후에 폐허 속의 한국을 등지고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독일 유학을 갔다. 천재에게 주어진 특혜치고는 파격적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당시에 희소가치를 인정받아서 24세에 대학 강사를 하고 이십대 후반에 조교수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요즈음으로 치면 파격을 넘어서 기적이다. 친일의 자손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주류 세력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케이스다.


그녀를 1세기에 나올만한 천재라고 치켜세우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친일파 자식의 자살마저도 승화시키려는 저의에 절대 동의 할 수 없다. 천재란 온전한 정신이 먼저다.


그녀는 문학가로는 ‘그릴파르처’를 좋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과묵한 애국가 변호사 었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철저한 매국노 변호사였다.

 

철학은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에 심취하다 못해 니체의 연인인 루 살로메까지 열광을 하였다. 그녀의 아비는 기독교를 믿었고, 자신은 1955년 카톨릭에 입교하였으니 (세례명, 마리아 막달레나)

 

니체의 철학은 그녀의 정신을 온전히 놔 둘 리가 없었다. 그녀는 두 가지 모두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 자신의 아비의 권유대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사법고시를 보아서 법관이 되었다면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애비는 제도권에서 계속 권위와 부를 누려오다가 1992년에 김구선생 암살 사건 진상 조사가 벌어지자 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김구 암살 당시 헌병대 부사령이었는데, 암살범인 안두희를 보호하고, 진실을 덮어두는 대가로 곧 사령관이 되었다. 국무총리 비서실장도 하고,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까지 지냈던 그는 80년 전두환 군부독재 때까지 법조계에 영향력을 미치다가 현재는 행방은 물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그녀의 글은 읽고 있자면 삶에 대한 의욕을 만들어 주면서, 삶에 대한 의욕을 동시에 겪어버리기도 한다.‘라고 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전혜린에 대한 망상을 지워 버려야 한다. 의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성격으로 만드는 전혜린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심성을 비틀어 놓은 그녀의 글은 문학적 가치로 접근을 하기 보다는 정신과적 분석을 받아야 마땅하다.


아래 글은 전혜린이 이십대 후반에 쓴 글로서 자살을 앞두기 불과 몇 년 전의 글이다.

파란 글씨’는 그녀의 글이며, 그 밑에 ‘검은 글씨’는 나의 주석이다.


한순간도 쉴 수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항시 팽팽한 의식을 곤두세워야 했다.

항상 무언가에 부딪혀 터질 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

터질 듯하면서도 터지지 않는 긴장감은 어찌 보면 가장 아름답고 멋진 꿈의 정신이기도 했다.


이미 상당한 정신병 증상이 진행된 상황의 글이다. 일종의 강박증인데 여기서 더 진행되면

분열증세로 나타 날 수 있다. 인생을 ‘긴박’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여야 행복감을 느끼고 있지만 곧 분열된 자아가 나타난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이것은 권태다.

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것. 이것 또한 권태다.

늘 변함없이 쳇바퀴를 도는 일상성. 이것 역시 권태임이 틀림없다.


20대에 하기 싫은 법학을 때려치우고 독일유학을 다녀와서 대학 강사와 조교수를 지낸 여인의 삶이 권태롭다면 대한민국의 전업주부들은 그놈의 권태 때문에 다 죽어야 마땅하다.

긴장감과 권태는 한 인격 내에서 동시에 공존하기 어렵다. 이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된다

왜냐면 마음을 털어 버리고 나면 우리는 보다 가난하고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은 속을 털면 털수록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자신을 털어 놓아 봤자 더러운 친일파의 딸이라는 것과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 왔기에 털어 놓을 수도, 놓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털어 놓을수록 멀어질 것은 자명하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은 세상과 자신이 단절되었다고 상상을 한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가고 있음이 보인다.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면서 달아나는 시간만큼이나 쉽지

하지만 웃기는 어렵지

찢어지는 가슴 속에 웃음을 짓는다는 건

이빨을 잔득 악물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끊임없이 넘쳐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지의며 남을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주위에서도 지옥을 사자진다

그러나 웃기는 어렵지

웃음이 삶인데도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임에도


웃으며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1930~40년대의 시상(詩想)으로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앞서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덧 모두 사라지고 마치 미친 여자가 눈웃음을 치지만 이빨을 악물고 독기를 품은 것처럼 완전히 이완된 자아가 보인다.

 

마지막에 ‘우리’ 라고 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위대하게 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위대’라는 말을 쓰는 것만큼 오만함은 없다.

 

너무 혹독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 동의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사회는 그녀보다 억울하게 살아온 여성들이 너무도 많고, 그녀의 글을 도저히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삼성가의 며느리였던 고현정이 전 혜린에 심취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여고시절에 읽을 책을 아줌마가 되어서 읽은 것이다.

 

전 혜린! 이제 이 이상한 여인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는 여성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