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께 3.

두 아들 아빠 2007. 4. 26. 16:40
아들을 마마보이로 키우는데 성공한 엄마들-


사내아이는 성장해서 자기 주도적으로 독립적인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엄마에게 자기주장을 제대로 관철 시키지 못하거나, 반항 한 번 못하고 질질 끌려온 사내아이가 뭘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아이는 착하기는 한데... 순해 빠져지고 남자다움이 모자라요.”

엄마의 영악한 머리로 아이의 남자다움을 일찌감치 거세 시켜 놓고 하는 천편일률적으로 하는 자랑 섞인 푸념이다. 여자인 자신에게 길 드려진 사내아이가 한편으론 씩씩하기를 바란다면 이상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엄마의 대한 아들의 반항과 저항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아서 안 된다. 일종의 어른이 되어 간다는 신호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야 한다.

엄마는 아들의 영역을 무시로 넘나들면서 아들에게는 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태도는 바르지 않다.


엄마와 아들사이에는 대등한 싸움이란 없다.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질러 대는 것이다.

아들의 사춘기때 일시에 역전 당한 엄마들은 잘 알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 안 된지만 우려하는 사태를 맞은 엄마들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들의 공격을 받아 본 엄마들은 가슴이 떨리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못한다. 내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기에 대처 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우선 아들의 자아가 컷 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엄마가 너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를 해야 한다. 아들이 이내 미안해 한 반응이 보일 정도로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방법론을 지적해야 한다.(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오지 못한 엄마들이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아들도 자기처럼 만들려고 한다. 정말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그래야 아들을 마음대로 주장하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뿐 아니라 가정도 아낙네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아들들이 성장하면 자기 주도성이 강한 여성에게 쏠리게 된다. 자기를 대신해서 엄마에게 복수해 줄 ‘복수의 귀’를 고른 일이다. 아들로써는 탁월한 선택이며 앞으로 삶의 균형을 잡아 줄 다행한 일이지만 엄마로서 아들 주장은 끝장난 일이다.


워낙에 천성부터 자기주도가 강한 젊은 며느리와 천성부터 살아 온 나날 모두가 자기주도 없이 살아 온 늙은 시어머니와의 싸움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당연히 시어머니 쪽이 왕창 깨지는 일이다. 더 열이 받는 것은 아들이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엄마가 남편으로부터 지지와 인정받고 있는 상태라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남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서 쥐처럼 구는 엄마가 아들을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아들에게 일찌감치 절단난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엄마를 다루고 제압하는 방법을 생활 속에서 익혔기 때문이다.


이웃가정에 아버지가 직장관계로 멀리 출타 중인데 아들이 갖고 싶은 것을 엄마가 사주지 않자 밥을 먹지 않는 것이다. 엄마는 결국 아들에 그것을 사주고 말았다. 그 아빠가 그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아들도 같은 방법을 쓴 것이다.


맹모(孟母)와 신사임당, 한석봉의 어머니가 존경 받는 이유는 홀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석봉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도 베풀었지만 아버지가 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 사랑도 주었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칭송 받는 것이다.


사내아이를 키운 다는 것은 결국엔 독립을 할 사자새끼를 키우는 것과 같다. 더구나 자식은 그냥 크는 게 아니다. 온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래서 온전한 어른이 되게 해야 한다.


성인이 된 자녀는 더 이상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마치 오래된 혹을 땐 것처럼 시원섭섭해야 한다. 뗀 혹이 섭섭하다고 다시 붙일 사람은 없다. 그런데 계속 붙이고 다닐 여는 사람이 있어서 황망하다. 왜냐하면 정작 달고 다닐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