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께 4.

두 아들 아빠 2007. 4. 28. 14:19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지만, 오뉴월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도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 = 개 팔자가 (상팔자)

이 두 문장을 인수분해 하듯이 동류항인 (상팔자)를 지우면 ‘무자식은 개 팔자’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던 사람이 개 팔자가 되면 안 된다.(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딸만 있는 아버지들은 젊을 때에는 별 반응이 없다가 중년이 되면서 은근히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두 아들 아빠인 내 경우에서 보자면 팔자 좋은 소리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암투에 가까운 끔찍한 경쟁 심리를 알고 나면 진저리를 날 정도다. 처음에는 공정한 심판관이 되고자 개입을 하다가 이내 관두게 된다. 애초에 이들의 싸움을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자체가 넌 센스다. 부모가 다툼을 일으킨 주범이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싸움은 먼저 거는 쪽이 부모의 관심을 끌고자하기 때문인데, 처음에는 걸려서 혼이 나지만 점점 지능적으로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에 잘잘못을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실지로 본 예인데, 같이 두 아들을 둔 가족과 외식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집에 큰아이가 물수건으로 손을 씻고는 맞은편에 있는 자기 동생에게 던졌다. 몸에 수건을 맞은 동생은 자기 것과 형이 던지 것을 두 번에 걸쳐서 형에게 집어 던졌다. 그 중 하나는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고 이에 형은 상 밑으로 발로 동생을 밀어 찼다. 동생이 아프다며 울고 급기야 그 집 아빠가 끼어들었다.


당연히 ‘누가 먼저 했느냐’ 로 문책 했지만, 형은 동생이 수건이 없는 것 같아서 던진 것이라고 우겼다. 그런데 동생이 화를 내면서 두 개를 던져서 하나는 자기 얼굴에 맞아서 화가 나서 발로 걷어찼다고 했다. 우리가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형이 좀 참아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너그럽게(?) 결말이 났다.


큰아이는 나름대로 자기에게만 집중되는 구도를 좀 흩트려 놓으려고 하는 짓이다. 그리고 동생도 나쁘다는 것을 부모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유독 동생에게는 관대한 부모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도 있다.


이쯤 되면 아버지는 대게는 분별도 어렵고, 귀찮아서 형제를 억압적으로 누르게 된다. ‘한번만 더 그러면 둘 다 혼 날줄 알아!’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동생의 심성은 점점 삐뚤어지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먼저 부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게 자신이 생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자신에게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면 반대로 부모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관심 자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과정 중에 눈 밖에 난 아이는 내처지고, 그렇지 않는 아이는 당연히 편애하게 된다. 이것 말고도 형제를 싸우게 하는 이유는 더 있다.


형제들을 태어난 순서에 의하여 권한을 주는 행위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같은 어린아이인데, 누가 누구를 훈육하고 가르친다는 말인가?

형제애를 다룬 교훈적인 이야기는 어린 형제가 아니고, 모두 독립적으로 성인이 된 형제에 관한 것이다. 흥부와 놀부이야기가 그렇고 볏단을 밤 세워 서로에게 나른 형제 이야기가 그렇다.


형이 진정한 어른이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동생은 형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그러다 동생도 어른이 되면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이웃으로 남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부모가 어렸을 적에 형이라고 무리하게 참을성을 요구하거나, 동생에게 복종을 강요하면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부모 밑에서 빌어먹는 자식들끼리 무슨 권한의 차이가 있고, 계급이 있는가?


이를 조장하면 정작 커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이웃이 되기는커녕 원수사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형제라는 굴레 안에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회적인 윤리 안에 거하는 것은 괜찮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