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삶의 출구가 더 가깝습니다.

두 아들 아빠 2007. 7. 11. 18:11

('두 아들 아빠'님의 초대로 글을 올립니다. 이 방의 독자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블로그 글 가운데 주제에 일치하는 부분을 가끔 퍼올리겠습니다.) 

 

출퇴근하면서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한 상념이 가장 활발하게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직장에서나 인생에서나 입구보다 출구가 더 가까이 느껴지기에 착잡함이 더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출퇴근길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상념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이 몸은 참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상당 기간 우리 의식을 사로잡는 것이 가시 세계이고 그래서 몸나를 둘러싸고 형성된 의식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철에서 매일 마주치는 - 어쩌면 평생 단 한 번 마주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사람 간에 차이를 느끼며 강조하며 살아가는 것은 '몽환포영(夢幻泡影)'에 지나지 않는 가시 세계에 갖힌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쨋든 '신과 나눈 이야기'를 쓴 월시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보라고 하였는데 오늘까지 얻은 결론은 '나는 몸나를 가진 의식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죽기 전에 죽는다 함은 몸나에서 길러진 헛된 의식 가운데 가장 강렬한 '탐진치'를 소멸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다면 참으로 죽은 자처럼 살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일이 노력과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가톨릭의 가르침은 맞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의 과오는 매순간 대면할 수밖에 없는 본래 의식이자 전체 의식(또는 신의식이나 신이라 할 수 있음)이 감시자나 고발자로 왜곡될 수 있도록 강조한 데 있습니다.

 

신의식은 사랑입니다. 탐진치의 소멸과 신의식에의 일치를 지상에서 획득할 수 있다면 죽음은 두렵지 않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완성되고 독립된 강한 개인이 됨으로써 해탈 또는 지상 천국은 가능한 것인데 조직 종교는 몸나의 의식에 영합하고 사람들을 조직에 의존토록 함으로써 나약한 기복자로 만드는 한계를 가집니다.

 

셋째는 몸나의 소멸은 5령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홀로 전혀 다른 차원에 자신의 존재를 던져 넣듯이 개별화된 의식이 전체 의식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 일이 될 거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오직 혼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미지의 불확실성으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반드시 '무루지(無漏知)'를 얻어 가져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바가바드 기타의 요약본을 읽고 있어서 저런 생각이 더욱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