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사춘기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엄마들께!

두 아들 아빠 2007. 7. 17. 09:51
결론부터 말하면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엄마의 영역을 떠난 것이다. 따라서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자책할 필요가 없다. 엄마는 양육의 노고로 자신의 책임을 다 한 일이다.


큰아이가 딸이거나 딸만 있는 부모는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아들이 첫째인 엄마들은 버거워 한다. 그 이유는 완전한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할 숫 사자새끼를 키우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은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서 미래에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아들을 키운다는게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


아들의 사춘기는 아버지가 나서야 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엄마의 사랑 다음에는 ‘조건 있는 사랑’을 아버지가 해야 한다. 그래야 균형감있는 인격체가 형성될 수 있다.


아내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 주지도 않으면서 아들의 문제를 아내에게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게 하면 아내와 아들은 일정 부분에서 야합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집안공기가 좀 이상한 경우는 아내와 아들이 한바탕 했지만 남편과 아버지의 등장에 둘 다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들은 엄마의 말을 잘 듣는 듯 하다 사춘기가 되면 반항을 하게 되었다. 덩치가 큰 아이인 경우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미 엄마를 완력으로 제압하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 학원이 계속 번성하는 이유는 엄마가 사춘기 아들과 맞닥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아들을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리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은 다 거짓이다.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던 속칭 일류대학을 가는 학생은 극소수다. 그저 목표가 있다는 자위 일 뿐이다.


남편과 마땅히 나누어야 할 사랑이 막혀 아들에게 이를 투사하는 것인데 母子 지간이 아니라 불륜에 가까운 사이를 이루기도 한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고 지지해주지 않으면 아들을 자신의 편 삼아서 남편에게 대적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엄마의 속내를 아들이 간파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엄마와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엄마 앞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아버지와는 맞닥트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남편에게 있다. 아내에게 주어야 할 사랑을 주지 않고 아들의 교육 모두를 아내에게 떠맡기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나마 아들이 학업 성적이 좋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가정은 늘 삐 끄덕 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들은 안절부절 못한다. 좋은 학원의 정보와 과외선생님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엄마들의 경우 만성 두통에 시달리거나 항상 몸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경성이었지만 고질병으로 도질 수 있다.


이쯤 되었다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아들을 주장하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단 둘의 시간을 마련해서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기를 권한다.


“난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시랑 했기에 결혼을 했고,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기뻤던 일은 당신을 닮은 아들을 낳은 순간이었다.” 잠시 여유를 두고,


“진정한 내 사랑은 당신이지 아들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을 닮은 만큼 앞으로는 당신이 교육을 시켰으면 좋겠다. 당신은 지금까지 삶을 잘 살아온 사람이기에 그 실력을 아들에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아들교육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는 아버지가 하고 엄마는 확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의 이행여부를 아내에게 점검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아들이 엄마를 절대로 무시 할 수 없으며 아들의 교육을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옮겨 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아들을 주장하는 마음도 권력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들의 교육마저 빼앗기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어 질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대게 상황이 극도로 악화가 된 후에야 가슴을 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