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주에 대한 단상 2.

두 아들 아빠 2008. 9. 30. 22:28

공주의 우금티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오르는 길이며 경상도는 추풍령도 있지만 대개 충북의 문경세제를 넘었다.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이어진 영남대로는 거리가 960여 리에 달하고 실제 걷는 기간이 약 15일 정도가 걸렸다. 해남 땅끝 마을에서 한양 남대문에 이르는 호남대로는 980리 길이며 역시 약 보름 동안 걸어야 한양에 당도했다.

 

하루 평균 65(26) 정도를 쉬지 않고 걸어야 했다. 호남대로가 20리 더 멀지만 영남대로와 비슷하게 걸린 것은 평야지대가 많아 비교적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많기 때문이다. 성인 남자가 한 시간에 약 십 리를 걷는데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아침부터 주막에 도착하는 저녁까지 꼬박 9시간은 거리에 있어야 했다.  

 

충청도는 이렇게 호남과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에 아래 지방에서 올라오는 임금께 올리는 진상 품을 보고 이와 비슷한 품질과 양을 올려 보냈을 것이고, 중앙의 세도가가 하루 아침에 귀향 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충청도는 지리적 여건으로 한양과 영호남의 중간자 역할을 했는데 지금도 우리 정치사에서 이른바 게스팅 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정부에 반감을 가진 귀양 자들이 영남과 호남의 끝자락으로 갔기에 이들 두 지역은 반 정부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지만, 충청도는 그런 불평분자들이 머물지 않아서 역사적으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킨 적이 없다. 그래서 충청도 양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평가는 어찌 되었건 역사적으로 그 양반 동네의 중심은 단연 공주다.

 

마곡사와 소나무

 

 

 

생산 시설이 없는 여타 중소도시도 마찬가지 이지만 공주 역시 관료사회와 그 집단을 유지시키는, 예를 들어서 공기업 출장소, 은행 등 최소한의 기관만이 있고 공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생산한 농업생산물과 그 유통구조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열악한 구조에서 왕이 요구도 하지 않는데 매년 공부 잘한 아이들을 비지땀을 흘려 서울로 진상하고 있다.

 

공주에는 부여, 청양군을 관장하는 세무서, 법원 등 기관들이 있는데 생활권을 대전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종합대학이 된 공주대학교와 공주 교육대학원, 영상정보 대학이 있는데 한일고등학교와 공주대학부속고등학교는 이른바 명문 대학 진학률이 높은 전국에서 알아 주는 명문고등학교이며 공주고등학교도 소수 정예화에 힘을 쓰고 있다.

 

공주의 구시가지는 약 10km2 면적으로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바로 앞에 흐르는 금강 덕분에 어느 곳에 우물을 파도 충분한 수량이 나온다. 금강 북쪽의 신시가지는 공주대학교를 중심으로 고층 아파트 군이 있으며 현재 면적은 구 시가지의 약 절반에 해당되며 점점 넓혀가고 있다.

 

내가 사는 교동은 향교가 있어서 교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에 일제 시대에 감옥소가 이었는데 70년대에 금강 건너 북쪽으로 이전했다. 현재 우리 집은 당시 교도소 소장의 관사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