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범선생 서거와 6.25전쟁

두 아들 아빠 2009. 6. 25. 13:05

 

6.25전쟁 59주년과 백범선생 서거 60회 기일
(서프라이즈 / 두 아들 아빠 (kkh6934) / 2009-6-25 10:28)


 

 

숫자로 명명한 전쟁

 

 

전쟁 발발일로 부쳐진 ‘6.25전쟁’은 그 이름부터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이다. 전쟁을 일어난 날짜로 지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에서는 ‘대동아 전쟁’으로 불리는 미국과 일본의 제 2차 세계 대전을 1941년 12월 7일에 벌어진 하와이 진주만 폭격 날짜로 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한국동란’이라고도 하지만 6.25 전쟁이 압도적으로 많이 통용된다. 페르시아 전쟁, 십자군 전쟁, 크림 전쟁, 발칸 전쟁, 러일 전쟁, 청일 전쟁 등 전쟁의 이름은 지역과 나라대 나라의 이름을 짓는 것이 대세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89년 전에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났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의 최대 승전국의 위상 때문에 그 이후에 벌어 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남북전쟁이라고 국제적으로 통용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8.15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은 거의 모두 날짜로 지어졌다.

제주 4.3 사건,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반란, 1.21사태, 7.4 남북선언, 10.26사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 민주화 혁명, 4.13 호헌 선언, 6.10 민주화 운동, 6.15 남북성명 등등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여수반란사건, 4사5입 개헌, 국회프락치 사건, 124군 부대 청와대 습격사건(1.21 사태라고도 함) 등이 있다.

 

이렇게 날짜로 짓는 이유는 엄청나게 쏟아지는 사건을 일일이 규명하여 이름 짓기조차 버겁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12월 3엘에 터진 엄청난 IMF 사태는 날짜로 부르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연관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6.25는 통일전쟁인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패권을 잡은 집단을 살펴보면 외세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을 척결했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무너트린 통일신라가 그렇고. 이보다 더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자기 나라 왕보다 명나라를 더 존중한 집단들이다. 이성계는 군사 구테타의 원조다. 이제 역사는 신라의 백제와 고구려 침략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지, 침략전이라고 하지 않고, 이성계를 군사반란자라고 하지 않는다. 친일파도 그 역사를 믿고 있다.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인민해방전쟁’이라고도 하지만 대한민국은 ‘북괴의 침략전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외국의 입장에서 자기 민족끼리 전쟁을 침략이라고 인정해주느냐가 문제다. 그들은 어느 쪽인가 벌린 ‘통일을 위한 내전’이라고 할 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이 전쟁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서 감옥에 집어넣기도 한다. 그렇기에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제 치하에서 이웃을 팔아 호의호식했던 자들이 해방 후 이승만을 옹립했는데 그들이 심각한 이유는 일제와 미국이라는 한통속의 양대 세력을 시간차도 없이 갈아타고 호령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해방이 되자 곧바로 친미로 갈아탔다. 그들은 같은 민족인 북한과 대척 일변도로 나가고 있었는데 이젠 그 변종이 나타나 실용을 앞세워 영어몰입교육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다 시피하고 있다. 이게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강요한 일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6.25는 백범과 한반도의 제사 날?

 

 

6.25 전쟁이 날짜로 이름 불리기에 알레고리 하나를 들어 보겠다. 6.25전쟁은 한해 전인 1949년6월26일 경교장 2층에서 암살당하신 백범김구 선생님의 서거 1주년 기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이 한반도 전체의 제삿날이 된 일이다. 당시만 해도 명분을 중요시하던 마르크스주의자 김성일이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1주기에 남한 전체를 싹쓸이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역사가들이 왜 이 부분에 침묵하고 있을까! 우연이기 때문일까?

 

인간이 바라보는 역사의 한계는 바로 ‘우연’이다. 의인 노무현의 죽음으로 역사가 어떤 우연을 낼지 두려울 뿐이다.

 

 

시기적으로 보아 6월25일은 북한의 주 곡물인 옥수수의 파종을 추운 지방인 함경도까지 5월 말에 끝나고, 모내기도 6월 중순이면 마친다. 남북한이 한해의 식량 파종을 끝을 낸 시기다. 다만 한반도의 전통적 우기인 장마철을 앞두고 있었지만 전천후로 누빌 수 있는 무한괴도의 소련제 T34 탱크의 위력을 믿은 것 같다. 하지만 도하 장비가 부족한 북한군은 불어난 강물로 여러 날을 지체 했다.

 

 

6.25전쟁은 발발 원인은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서 이데올로기가 극명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피 흘리는 전쟁밖에는 없었다. 또 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진국인 중국과 소련, 미국 등은 앞서 오래 동안 치룬 큰 전쟁으로 인해 멈출 수 없는 전쟁의 관성과, 연공서열로 인한 내부 다툼을 진화하고, 엄청나게 남은 전쟁 물자를 소비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을 벌려야 할 조건이 필요 충분했었다.

 

 

국가보안법과 보도연맹

 

 

예상되는 전쟁을 준비하는 조치 중에, 개를 죽이는 일도 포함 된다고 한다. 개가 포성과 화염으로 인해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6.25전쟁 때는 개가 아니라 사람을 미리 도륙했다. 감옥에 있던 좌익수와 국민보도연맹으로 분류된 민간인들을 사전에 재판도 없이 전국적으로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사진설명 : 1950년 7월 추정, 미군이 학살 직전에 찍은 사진, 공주에서 대전 가는 길목의 금강변 왕촌살구쟁이에서 약 7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이 사진을 보고 공주대 지수걸 교수는 금강변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래 사진은 피해자 중에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일하게 얼굴이 나온 사람을 유가족들이 확인하기 위해서 확대한 사진인데 '특경'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철모 쓴 왼쪽 사람이 조금 있다가 사살한 상황인데 포즈를 취하라고 했는지 빙긋이 웃고 있다.

 

 

 -학살 대기 중인 차량들-  앞에서 나는 총성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충남 관용'이라고 쓴 트럭에서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이길레 짐승보다 못하게 죽어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한국정부와 미국은 이 사실을 은퍠하고 있었는가?

 

  

미국이 이 부분의 정보 공개는 보류하고 있는데 학살 전 미군이 찍은 사진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무소불의의 미군정이 묵인한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 때 ‘미국 놈 믿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광주학살의 묵인도 의심 받고 있다.

 

 

당시만 해도 책이 귀할 뿐 아니라, 교육의 여건이 좋지 않아서 문맹률이 높아 진성좌익이 그리 많을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 보거나,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을 좌익이라 할 수 없다. 사상적으로 훈련 받지 못한 사람을 사상범이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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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도연맹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남한 각지 구석구석에서 무려 30만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쟁 전후에 학살당했는지 집계조차 없는데 대략 추산으로 20만명 내외라고 한다. 당시의 보도연맹 사람들은 공산주의식 민중혁명이 아니라 반 친일을 외쳤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가족이나 친지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가족, 친지 전체를 보도연맹이란 사슬로 묶어 버렸다.

 

 

지역마다 할당 인원이 내려왔다는데 경찰관에 술을 받아 마시고 가입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6.25 이전 북한에서 친일, 지주 계급의 월남자가 30만명으로 추산 되는데 할당의 숫자가 이들의 숫자만큼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게 산골짝이에서 끌려와 개처럼 죽었다. 대 학살로 남한 전체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서 더 이상 반 친일파를 외치지지 못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죽인 법인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대한민국이다.

 

 

권력과 국가를 동일 시 시킨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권력과 기득권 유지에 법을 이용한 것이다. 반민족행위자특별처단법(반민특위)이 1949년 1월에 발효되고 그해 8월에 무산되었는데 그 이전 해인 1948년에 이미 나온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이법에 대한 맹종을 하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다. 이 법을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한 자들과 이들의 시킴을 받고 학살에 앞장선 자들인데,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도 엄청난 두려움으로 이 법의 존치를 옹호하고 있다.

 

 

책임은커녕 권력을 공고이한 전쟁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대륙세력을 끼고 도는 정권이 들어 섯 기에 북한도 권력의 암투가 처참하게 벌어졌고 김일성 일가의 독재를 유지하는 과정 중에 수많은 인민과 정적이 죽어나갔다.

 

북한은 일제 앞잡이를 처단했다고는 하나 6.25 전쟁 전에 수십만명의 친일파를 남한으로 일부러 방출한 의혹이 있다. 남한 전역을 쓰레기장으로 만들려던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남한 전체가 반목으로 분열되어 스스로 무너져 버리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주 4.3사태와 이로 인해 터진 여수 반란 사건으로 큰 소요는 있었지만 북한이 원하던 대로는 되지 않고, 남한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장이 되어 반공이 국가와 국민의 신앙이 되어 버렸다.

 

 

남북한의 권력집단은 6.25 전쟁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다. 남북한 공히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집단이나,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전쟁 후 책임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을 더욱 국권이 다지게 되었다. 남북의 전통적 기득권이 반세기를 넘도록 유지되고 있다. 남한은 반공을 앞세워 정적을 제거했고. 북한은 미제 앞잡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똑 같이 했다. 남북한 모두가 외세를 앞세워 권력과 정권을 유지한 일이다.

 

 

또 다시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지극히 회의적이다. 한반도를 다시 전쟁의 도가니에 빠트릴 수 없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미국과 일본이 북한 처서 얻을게 없다는 것이다. 중동처럼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 같은 부수적인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두 번째는 한국경제의 괄목할 만한 국제 경제적 위상 때문이다. 만일 남한이 전쟁으로 인해서 석기시대로 돌아간다면 세계 경제가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수출을 해서 벌어먹었지만 이를 통해서 목숨까지 담보 받고 있다. 열심히 일한 다는 것은 여하간 좋은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의 자본과 외국인 때문이다. 몇 해 전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상주하는 세계의 각국 외국인이 백만 명이 넘고 이들 중에 중국과 러시아인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리고 우리 증시에 엄청난 외국자본이 투자되어 있다. 이를 싹 무시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전쟁이란 광기에 의해서 벌어지는 미치광이들의 예측할 수 없는 노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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