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인정하지 않은 가정 이야기

‘아내와 술’

두 아들 아빠 2008. 11. 2. 21:03

좀 더 젊었을 때는 직업상 접대와 접대 받음이 이어져서 꽤나 많은 술을 마셨다. 어느 날 이렇게 술을 계속 마셔 대다간 제명에 죽지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몇 년 전부터 접대를 해야 하는 술자리 외에는 가급적 피하고 술 생각이 나면 아내와 마셨다. 연애시절에 어디서 무엇을 하던 꼭 술자리로 마무리를 한 덕에 아내의 술 실력은 나와 대작을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두 아들을 낳고 키우느라 술을 마시지 않았던 터라 다시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잘 마시지 못했지만 이내 예전의 실력이 되살아났다. 아내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셔대다가 기억에 남는 사고를 두 번 친 적이 있었다.

 

에피소드 1.

 

98년 경남 거창에 살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 길 건너에 아내와 가끔 가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불타는 멀구내"라는 꼼장어 집이 있었다. 우리보다 더 젊은 두 내외가 장사를 했는데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안주 맛도 좋았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아내는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면 하루 종일 집에 있기 일쑤였다. 어느 날 아내의 적적함을 달래 준다고 두 아들을 재워 놓고 오붓하게 둘이서 그 집을 찾아 갔다. 그날따라 그 집 내외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서비스 안주를 내놓아서 정말 기분 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자정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한참 뛰 놀 때라 일부러 아파트 1층에 살고 있었다. 분명히 잠그고 나온 현관문이 삐쭉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열어 보니 현관 바닥에 아이들 신발이 없었고,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뛰어서 안방에 가보니 두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순간 술이 확 깼다.

 

아파트를 돌면서 한밤중에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파트를 한 바퀴 돌고 맥이 빠져 들어오다 보니 실내등을 어슴푸레 켜 놓은 아파트 경비실 안에서 두 녀석이 눈물을 흘리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큰아이가 자다가 일어나 엄마, 아빠가 안보이자 동생을 깨워서 잠옷 바람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돌아가신 애들 할아버지가 아셨으면 경을 칠 일이었다. 경비아저씨에게 고맙고 죄송하다는 말도 변변히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에피소드 2.

 

아내와 술자리는 주로 저녁 가족 외식 때 가볍게 한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이들이 좀 커서는 그 날 술이 받을 정도의 이슈가 있으면 아이들만 집으로 보내고 둘이서 2차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아이들은 잔소리 없는 저녁 시간을 만끽해서 좋고, 우리부부는 오붓하게 둘 만의 시간을 가져서 좋은 ‘부모 좋고 아이들 좋은’일이다.

행신동 아파트 현관문의 열쇠를 번호 키로 바꾼 이유가 있다. 7년여쯤 전 그 날도 두 아들이 잠든 후, 아내와 한 잔 하러 동네 먹자골목으로 갔다. 이런저런 신변의 잡다한 이야기를 주제로 담소를 나누며 대작하다가 열두시가 훨씬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 이르러서야 아내 주머니에서 열쇠가 빠져나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 우리가 갔던 술집이며 화장실이며 주변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두 내외가 마치 달밤에 바늘 찾기 식으로 찾아보았으나 역시 헛수고였다. 아내의 호주머니에 직접 손을 넣어서 찾아도 보았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깊은 잠에 빠진 아이들이 받을 리 없고 그렇다고 남들 곤히 잠자는데 현관문을 두드릴 수도 없고, 초인종을 오랫동안 눌러보아도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래!~ 이참에 궁금했던 모텔이나 가 보자. 오다가다 봤던 ‘ㅅㅇㅂ호텔’에 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니 제일 비싼 방을 내 카드로 당당히(?) 계산하고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의 넓은 방에 원형의 침대와 한쪽벽면 전체가 거울로 되어있고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가 있었다. 욕실 면적이 우리 집 안방만 하고 그 안에 유리부스의 증기탕이 별도로 있었다. 너무 비싸서 아깝다던 아내는 방을 둘러보고는 흡족한 듯 했다.

 

짧은 신혼 같은 밤을 지내고 아침이 문제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계속하였더니 다행히 큰아이가 전화를 받았고 아내가 말했다. "음~ 엄마 아빠 아침운동 하러 나왔는데 열쇠를 안 가져 왔거든, 얼른 세수하고 학교 갈 준비하고 있어"

“웬! 한 번도 하지 않은 아침운동?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잠그고 갔지?” 아들은 따져 묻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보통의 아주 평범한 아이들이다. 늘 감사 할 일이다. 난 이 날 이후 강한 의문으로 의처증이 생겼다. 아내가 일부러 열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동네 술집에 우리처럼 부부가 술을 마시러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술집에 같이 들어 온 경우보다 남자나 여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경우가 있는데 남들을 유심히 봐서가 아니라 비슷한 패턴을 여러 번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술과 안주를 시킬 때부터 한 쪽이 좀 심드렁한 표정이면 영락없다. 상상컨데 남자의 차림이 대부분 정장이나 외출복인 것으로 보아 퇴근하여 집 근처에 와서 아내를 전화로 불러 낸 것 같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듯싶더니 둘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린다. 대부분 술과 안주는 손도 안 된 채...

 

남편이 분위기를 바꾸어 문제를 풀려고 시도를 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대화를 풀어가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주로 자신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아내를 설득하려 하다가 먹히지 않으면 급한 성질에 소리를 지르거나 자리를 밖 차고 나간다. 같은 남편의 입장에서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힘차게 박차고 나가서 어디로 가려 하나...그 다음 수습은 어떻게 할까?

 

한번 잘못 찬 똥 볼은 겸연쩍은 웃음으로 넘기면 된다. 집안에서 완벽하려는 남자들은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박적인 마음이 있다. 이걸 인정 안하면 계속 똥 볼을 차고 마는 것인데 딴에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하다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일정기간 냉전을 하다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겠지만 마음속에 쌓인 한은 쉽게 풀어진 것이 아니다.

 

아내와 술을 마시며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의 그런 시간은 각자 가슴에 담고 있던 상처를 달래 주는 방법이었다. 열심히 살아 온 지난날들이 쌓여서 오늘이 있었겠지만 선택권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그냥 추억으로 치유되기까지는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아내는 술이 주는 용기를 이따금씩 내게 부렸다. 그 중에 하나가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가끔씩 업어 달라고 한다. 나는 업혀서 자라온 오남매의 막내이지만 아내는 딸 다섯 중 바로 밑에 남동생이 있는 주목 받지 못한 둘째 딸이다. 아내를 업으면서 예전 보다 묵직함이 느껴지는 것은 내 삶의 무게가 아내에게 전이 된 것인지, 아니면 내 다리가 부실해졌는지... 지난번에 살던 아파트는 오르막길이 길게 있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르막인 집을 얻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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