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인정하지 않은 가정 이야기

인류 최초의 아담은 두 아들 아빠였다.

두 아들 아빠 2008. 12. 21. 16:46

그래서 제가 아담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만 아담의 기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 삶에 비취어서 말하고자 합니다.

 

아담(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의 형성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말을 잘 듣는 로보트를 만드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목숨도 끊일 수 있는, 자기 의지가 있고 이를 실행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본질을 꽤는 통찰력이 있기에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한번 보고 다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사명을 같이 할 대상을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라는 여성을 지으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하와를 본 아담은 단번에 이렇게 찬사를 보냅니다.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다!" 이렇게 여성이란 남성의 찬사를 받고 살아야 할 존재 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다들 그런 찬사를 받고 결혼을 했죠.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쫒겨나 아담은 가시 밭에서 땀흘려 일해야 먹고 살게 되었고,

하와는 출산의 고통과 양육의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둘이 난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의 살인이라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한 마디로 콩가루 집안이 되었죠.

성경은 인류 최초의 살인을 혈육, 그것도 형제간의 살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 예수께서는 '네 식구가 원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식구를 원수로 대한다면 어이없는 짓입니다.

인격자가 인격자에게 하는 말에는 은유와 비유, 때로는 과장도 있습니다.

부모가 화가 나서 "나가 죽어라!" 했다고 정말 나가 죽는 자식과 같은 경우입니다.

 

가족이란 집단은 지극히 폐쇠적이고 일정기간 안에는 벗어 날 수 없는 곳입니다.

남이라면 더 이상 보지 않거나, 고발과 고소를 할 수 있지만 가족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린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의 마음을 품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자식들이 할 수 있는 대항은 부모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자식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났다면 자식이 그렇게 되도록 일부러 했다고 보면 됩니다.

 

형제는 부모에게 인정 받으려는 다툼이 서로가 원수됨의 시작입니다.

형제가 싸움을 하는 이유 중에는 권력의 의지도 있지만, 부모의 인정에서 벗어난 자식이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싸움을 겁니다. 그래서 싸움의 원인을 부모가 따지면 혼 나는 지식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경우는 부모의 성향을 파악한 영리한 자식이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싸움을 겁니다.

어쨌거나 혼나는 자식이 정해져 있다면 달리 대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형제에게 바라는 것은 결국 사이 좋게 지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가령 형제간에 분명하고 엄격한 서열을 정해 준다든지, 아니면 어떤 기준을 두고 형제를 비교하거나,

더 심각한 경우 편애를 하는 짓입니다. 그러면 형제간에 살의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들 셋을 둔 아버지는 목숨을 거는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인격은 지키는 일이고, 성공하면 자식들이 우러러 보기 때문입니다.

너무 쎄게 말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