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인정하지 않은 가정 이야기

자녀는 언제까지 부모 밑에 있어야 하나

두 아들 아빠 2009. 4. 3. 22:49

요즈음 세태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결혼할 때까지라고 하는데 차라리 남남 이라면 서로가 눈치를 보고 서로의 의무를 다 하며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오래 기거 한다는 것은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각별한 내공이 요구됩니다.

 

농경사회를 일찍 벗어났다는 서양도 길어야 200년 전이며, 한국의 경우는 불과 50년 전입니다. 그 이전 수 천 년 동안은 농업과 어업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경제, 사회구조에서는 오래 동안 배울 일도 없었기에 대략 15~16세 정도면 성인과 같이 일을 했으며 그 나이 정도에 혼인도 했습니다. 따라서 일을 놓는 나이도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빨라 40대에 들어서면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현업에서 은퇴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여 30살이 넘도록 부모 밑에 기생하기도 하고, 반면에 부모는 60이 넘도록 일 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불과 50년도 안 된 일이며, 실질적인 현상은 더 최근의 일입니다.

 

땅이나 가업을 이어서 부모 밑에서 일을 한다면 모를까 다 큰자식이 늙은 부모와 함께 있는 다는 것은 선험적 경험이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많은 문제점이 돌출되고 있습니다. 자녀 스스로가 도무지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핑계가 공부입니다. 말이 독립이지 생활비는 다 대주고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에게 쓸데없는 애증만 쌓이게 됩니다.

 

경제가 발전하여 삶의 질이 나아지자 사회와 경제 구조가 복잡하고 고도화 되여 교육이 길어 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대학을 몇 번이나 옮기는 일도 벌어지고, 남자의 경우는 군대까지 갔다 오면 20대 후반은 훌쩍 넘겨 버립니다. 취업이 어려워지자 4년 이내에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습니다. 마치 다 큰 아이가 인큐베이터에 계속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원칙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있다는 일은 비상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함께 살더라도 성인 이전과 이후는 다른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을 뚫고 입학 한 이후에 부모 앞에 마치 개선장군 인 냥하고 또 부모가 그렇게 대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부는 했으되 진정한 성인되는 것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에 입학 후 당장에 경제적 독립을 하거나, 온전한 성인으로서 역할을 기대 할 수 없지만 이때부터 조금씩 준비는 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못했다 하더라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역할분담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청소, 세탁, 장보기, 음식장만, 설거지 등등 일상생활은 물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 정도는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못했던 어른 준비를 시키는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늙은 아내는 계속해서 불평등한 구조에 놓이게 되어 힘겹기 마련입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생활을 힘들어하고 이혼이 많은 이유는 남녀가 모두 대접받고 자라 온 환경에 익숙해져서입니다. 그러함에도 여성이 경제적 능력이 있기를 원해 맞벌이를 하여 더욱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 일입니다.

 

어머니는 씨를 받아 모종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밭을 일구고 추수를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은 아이들의 양육으로 할 역할을 다한 일이며, 성인을 준비 시키는 조건 있는 사랑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 산파가 탯줄을 끊었다면 성인이 된 자녀와 어머니 사이의 양육의 탯줄은 아버지가 끊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주장하는 마음이 계속 있거나 이를 아버지가 방관 한다면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온전한 성인이 되지 못한 자식으로 인해서 노후의 영혼이 황폐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신이 독립적 사고 있었다고 자녀까지 유전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온전한 성인으로 길러내는 일과 아내에게 양육의 노고를 치하하고 심리적으로 보상 해 줄 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방해나 방관을 했다면 자녀가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인식을 할 때는 아버지란 그저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사춘기 때 잘못을 했더라도 자녀가 성인이 된 시기에 이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녀에게 성인으로 책임과 의무를 엄격히 따져 물으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방관의 잘못을 보상하려 하고, 이미 실추된 아버지의 권위를 계속 이어 가려는 무지한 생각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성인된 아들에게 보다 냉정해야 합니다. 그게 온전한 관계를 유지 할뿐 아니라 새로운 관계설정으로 권위를 지켜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들과 심리적으로 더 멀어 질까봐 내심 두려워합니다. 그런 이유는 자녀와의 관계를 고착화 되어 마냥 어린애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인생의 선배와 후배의 관계로 격상해야합니다. 마냥 어린 아이로 대해서는 부모와 자식 간에 진정한 교제는 없는 일입니다. 자녀에게 계속해서 잘 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성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자체가 성인으로서의 온전한 대우의 시작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자녀와 아버지는 돌이 킬 수 없는 이상한 관계로 계속 가게 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거꾸로 된 관계 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은 성인이 된 자녀에게 그저 ‘잔소리! 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