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감동 없는 삶 2

두 아들 아빠 2009. 5. 1. 13:47

지난 4월 11일 올린 글인 감동 없는 삶 에서 최근 한 달 동안 감동받은 적이 없다면 자신의 삶의 판이 잘못되었다고 남의 말을 빌려서 말했다. 사실은 감동 받을 일은 무수히 널려 있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어서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산속에 혼자 살아도 마찬가지다.

 

감동을 받았냐는 것은 감동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인데, 보다 능동적인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 적이 있냐는 것이다.

 

감동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있는 삶이란,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으며 자신과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는 서글픈 일이다.

 

인격자란 타인에게 어떤 형식이든 영향력을 끼치게 마련이다. 사회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돈 많은 부모에게 기생해서 사는 삶이나, 그런 자식을 내치지 못하고 끼고 도는 어버이는 이 세상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족끼리 먹고 입는 것으로 이 세상에 공헌하고 있다. 이는 공헌이 아니라 자기 생존에 매달려 있는 일이다.

 

타인에게 주는 감동은 때론 물질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관심과 배려가 아닌가 싶다. 자기에게 닥친 일은 억울해서 난리를 치다가 남에게 닥친 일에는 강건너 불구경 식이다.

 

인간이 자신과 가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하지만 결과는 과히 좋지 못하다. 왜 그럴까? 감동을 받고, 주려는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존감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 한다. 여기에 자기 권리 찾기에 몰두 된 일이다.

그렇게 산 사람은  자녀가 다 보고 배운다. 그래서 어버이에게 똑 같이 한다. 그럴 때 부모가 분노하면 자녀는 부모의 가증을 확인하는 일이다. 부모를 막 대하고 험하게 까지 하는 자녀는 부모의 그런 모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부모로 부터 돈 이외에는 감동을 받은 적이 없어도 그렇다. 자녀를 돈으로 감동주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자녀가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할 때 돈으로 적극 지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도 애들일 때로 한정 된다.

 

감동을 받는 다는 일은 결국 진정성의 확인이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가증과 가식으로 살아 온 사람 안에서 진정성이 나올리가 없다. 여기에 자기 기만을 더해서 살아 온 사람은 결국 자식에 철저히 당하게 된다. 왜냐고? 말은 못했지만 다 보고 익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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