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어린이날의 단상

두 아들 아빠 2009. 5. 5. 13:43

 

어린이를 초등학생 이하로 국한 하는데 중학생부터는 청소년이라고 명칭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중고등학생은 가정과 사회적으로 어린이도, 성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라는 것이다. 어린이의 지위는 박탈되고, 그렇다고 어른의 지위가 조금이라도 주어지지 않은, 참 억울한 아이들이다.

 

그리 오래전도 아닌 시절에 왕가나 부자 집을 제외하고 어린이는 인격자 취급을 받지 못했다. 중세의 그림이나, 근대에 사진이 나오고부터 그림이나 사진에 나온 어린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리 밝지 못했다. 불안감이나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오늘 날 어린이들의 표정은 밝은가? 혹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착취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당시에 어린이는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는 어른들의 삶도 편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절대 왕권 밑에서 귀족들에게 핍박받는 서민들이 자기 자식을 잘 돌 볼 수가 없음은 어쩜 당연하다. 어른이 받는 사회적인 억압을 아이들에게 푼 일이다. 어른이 살기 나아진 오늘 날에 어린이들도 따라서 나아졌을까?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에 대해서 권면을 주었지만 당시에 성인 남성들의 귀에 들어 올 일이 만무했다. 어린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마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소자와 같아야 된다.’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거든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어라!’

 

자녀를 잘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며, 잠자리를 좋게 해주라는 등등의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뜻도 아닌,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잘해 주고, 사랑으로 대하기에 앞서 화나서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정작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해당된다.

 

아이들이 화나고 억울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는 화가 나서는 안 된다는 어른들의 무지한 억압이다.

버려두는 일이다.

형제자매가 있는 경우에 부모가 생각 없이 저지르는 편애다.

마지막으로는 설득하지 않고 윽박지름이다.

 

‘천국은 이 소자와 같아야 된다.’는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누가 천국에서 더 크냐고 제자들끼리 다툼을 한 후 확인 성 질문에 동문서답 식으로 한 말씀이다.

 

이 세상이 신분과 계급을 두고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만 천국에는 세상의 가치로 보아 크고 작은이가 없기에 이에 대한 질문을 무시하시고 소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하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셨다.

 

어린이를 온전하게 대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벌이 지극히 크기에 그 형벌을 피해가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어라!’

확실하게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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