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세대차이

자녀를 안다는 부모의 착각

두 아들 아빠 2009. 5. 9. 10:30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합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는데, 현재가 아니라 한참 과거형일 수가 있습니다. 대게 자녀를 안다는 시점이 어느 시기인가에 정체되었을 정황이 큽니다. 현대의 부모들은 너무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인격체끼리 서로를 안다고 하려면 그에 합당한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수평적 관계에서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냐는 것입니다. 수평적 관계란 친구와 같은 사이도 해당되지만 부모와 자녀가 친구는 될 수 없습니다. 자녀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부모는 자신만의 착각입니다. 부모를 친구처럼 대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부모를 무시하는 것을 친구처럼 지낸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수평적 관계란 베푸는 자와 이를 받는 자의 인식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를 안다고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수혜자와 해택자의 입장에서 벗어 난 온전한 대화를 과연 얼마나 나누었냐는 것입니다.

자녀가 밖에서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며, 어떤 정보를 접하는지 전혀 모르면서 안 다고 합니다. 그것도 미래에 있지도 않을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서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엄청난 세대차를 인정하지 않는 오류도 큰 걸림돌이 됩니다.

 

아이들은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면 부모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들어 내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할 언행이나, 손해 보는 말은 가급적 줄이고 감추게 됩니다. 그러다 아애 대화 자체를 닫아 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오로지 학교 성적으로만 들어 나는 일입니다. 그래 놓고 자녀를 다 안다고 합니다.

 

자아가 확립되기 시작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실현을 하게 됩니다. 진정 어른으로 변환되는 것입니다. 그 땐 누가 뭐라 해도 자기 판단에 의한 언행을 하게 됩니다. 타협은 있어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온전한 ‘거래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은 담보나 신용이 없는 사람에게 단 한 푼의 돈도 대출해 주지 않습니다. 자녀가 자기 의지를 강력히 나타내기 시작하면 은행과 고객의 단계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다만 자녀는 담보가 없기에 신용대출을 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두 번의 대출금이 이자도 내지않고, 원금 회수의 가능성이 없으면 바로 끊어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를 알려고 하는 효과 없는 노력보다는 이런 관계성을 맺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 지금 그런 관계성에 진입하려고 합니다. 내안에 유치한 비장함이 없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