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인정하지 않은 가정 이야기

결핍(缺乏)

두 아들 아빠 2009. 6. 20. 15:59

‘결핍’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 혹은 다 써 없어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꼭 채워야만 한다. 문제는 적절하지 않은 시기와 방법이다. 부모의 온존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무관심과 냉대, 혹은 핍절을 받았다면 성장과정과 성인이 된 이후에 어떤 형태 론지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람이 성장과정에서 큰 결핍이 있을 경우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결핍이 일어난 시기가 자아가 성립되기 이전인 10-12살 미만과 이후의 반응은 다르다.

 

요즈음 부모들에게 화두가 되는 결핍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주의력’(집중력) 결핍이다. 그런데 주의력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마땅히 지녀야 할 요소는 아니다. 특히나 몇 시간 동안 꼼짝 하지 않고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정도를 요구하는 주의력은 인간 본성이 아니다. 오로지 훈련에 의해서만 기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렇지 못한 것을 결핍으로 몰아가고 있다. 결핍이 뭔지 모르는 것도 결핍이다.

 

자아의 형성이전에 일어난 경우는 무기력 증상을 대부분 보인다. 그래서 현실 도피적인 시도를 하게 되는데 환타지에 몰두하거나, 본드와 부탄가스를 탐닉하고 요즈음 같으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기도 한다.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좀 더 성장하면 반항심으로 부모가 원하지 않는 길을 일부러 가기도 한다. 간혹 이를 극복하려고 무진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자신의 영혼 뿐 아니라 가족에게 좋지 않은 결과만 불러 올 뿐이다.

결핍은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자세가 우선이다.

 

부모의 입장에선 무한한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어린 나이에 학업에 지나치게 몰입을 요구하면 자녀의 입장에선 핍박이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쓰는 방법이 공부를 한 대가를 약속하고 이를 지불하기도 하는데 이 방법은 자아가 생기기 이전에만 잠시 효과가 있다.

 

차라리 그렇게 하느니 방관이 더 나은 결과를 볼 수 있다. 억지로 한 공부가 자신이 기대하고 상상했던 결과를 보지 못할 경우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확립되고 정체성을 찾아 가는 청소년기의 결핍은 장래에 큰 영향을 곧바로 끼치게 된다. 그 때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나이에 걸맞게 현실적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결핍은 어떤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시기는 자아가 성립되기 전의 유아기부터 아동기인 12살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결핍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 심리적인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을 더 중하고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아가 확립되기 전의 결핍은 두 가지 다 심각하게 작용하고 내제되기 때문이다. 결핍이 나중에 어려움을 주는 것은 결정적일 순간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결핍으로 위축된 심리는 세상의 힘을 얻지 못할 때는 잠재돼 있다가 힘을 좀 얻어서 뭔가 역할을 하기 시작해야 할 때에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것은 상실감과 박탈감이다. 어렸을 때는 물질이 정신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시기다. 이런 사람이 성인이 되어 어떤 물건을 한 번 갖고 싶다고 마음먹으면 꼭 갖고 말겠다는 강박감까지 생기게 된다. 취하지 못하면 크게 낙담하여 자신이 어려워 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물건은 당연히 취해야 한다는 당위성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어려서 짓눌렸던 상실과 박탈감이 꼬리를 물고 계속 못 견디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신, 심리적 측면은 배려와 관용이다. 어렸을 때 부모와 자녀가 나누는 사랑과 애정은 배려와 관용에 다 속한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이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기 때문이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개에 사랑을 준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부모는 자녀를 배려하는 것이지 사랑의 단계까지 올리는 것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을 한다면서 간혹 자녀를 혹독하게 내치는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보모에게 배려 받지 못한 사람은 성인되어서도 남을 배려할 줄을 모른다. 사회에서 행하는 배려는 가정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사회에서 행하는 배려는 진정한 배려가 아니라 거래를 위장한 것이 태반이다.

 

자기 자녀나 아래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거나 자신의 감정이 흔들릴 정도로 흥분하는 것은 어려서 부모에게 관용 받음이 부족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자녀나 아래 사람이 따라오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리고 못 견뎌 한다.

 

자녀의 실수를 너그럽게 넘어가 주지 못하거나, 잘못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지적하고 설득 못하고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부모 자신도 그런 배려와 관용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 된 자신의 잘못 만은 아니다.

 

적절한 배려와 관용 받음이 결핍된 사람이 관계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이를 잘 받아 온 사람에게 무한정 끌림을 받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자기 또래나 위 사람의 경우지, 아래 사람에게는 부러움과 시기심이 발동하여 애증으로 나타 날 우려가 있다.

 

심리와 정신적인 것을 문제시 하는 이유는 전부 관계성 때문이다. 특정한 사람이 보아 이상한 인격이라도 그 사람이 주변 사람과 관계성에 별 이상이 없다면 하등 문제가 될 일이 없다. 오히려 자신은 뭔가를 많이 알고, 그래서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띄는 사람들이 관계성에 어려움을 겪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역할을 사회가 인정하는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삶이 고단하지 않을 수 없다.

 

결핍은 결국 채워져야 한다. 아니 숙명적으로 채워지고야 만다. 노름에 탐닉을 하는 사람도 돈에 대한 결핍의 작용이다. 가정을 이룬 사람이 바람을 지속적으로 피는 것은 애정에 대한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결핍된 애정이 복수심으로 나타난 경우다. 타인과의 관계성에 죽자 사자 매달리는 사람은 외톨이의 고통스런 괴로움을 겪은 사람이다. 결핍은 아내와 남편이라도 채워 줄 수 없다. 남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채워야 한다.

 

먼저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가를 통찰해야 한다. 그 다음에 자신의 삶에 연관성이 있는 모든 관계성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인정하고 알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를 남이 절대로 지적하거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자신이 보호막을 씌우고 있기도 하지만 남이 알아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는 다 알고 있다. 그들이 계속해서 메세지를 보내는데도 무시하고 있다. 왜냐면 자신은 그들보다 힘도 쌔고 아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 앞에서 처절하게 당하고 나야 알게 된다.

 

결핍이 승화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뭔가 부족한 인간을 따스하게 매만저 주는 가정과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크고 작게 결핍이 있기 때문에 남의 결핍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결핍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게 가족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