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 앞에서’를 읽고

두 아들 아빠 2009. 9. 2. 18:14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정리하는 것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하기도, 아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앞에 것은 좀 짜증이 나고, 말은 비슷하지만 뒤에 것은 자신만의 통찰이 있다면 흥미롭다.

 

글은 논리가 정연해야 하지만 논문과 기사를 제외하고는 인격이 묻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격적 표현을 감정과 혼동을 하는데 자기감정은 옳지 않다고 전제 한다면 큰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 저자인 김성칠은 그런 기본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선비이자 학자다.

 

1940-50년대를 산 저자 김성칠의 책 ‘역사 앞에서’는 일기라는 특성도 있기는 하지만 그 책에선 아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뒷부분에 따로 주석을 달았다.

 

일기는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냥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글로 적으면 그만이다. 그 책에서 인격도 나타나지만 ‘인품’이 배어나온다. 시중에 나도는 자서전을 보면 자신이 경험 한 것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려 들어서 인내심이 많지 않으면 몇 장을 읽지 못하고 접게 된다.

 

‘역사 앞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전쟁까지 치르면서 첨예한 대립의 시대를 산 지식인이 바라본 한반도의 이야기다. 국립대학의 교수로써, 또 학자로써 남북이 벌이는 이데올로기는 사기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세상이 바뀌자 사람들의 돌변하는 태도에 가슴을 쓸어 내기도, 사상 검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서 탄식을 하기도 한다.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호소문을 들고 세 사람이 왔다는 사실이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남한을 안심시키려는 기만전술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호소문의 전문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시에 남한 당국이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알려진 호소문의 내용은 이승만을 포함한 남한 정계의 아홉 명을 제외하고 통일시키자는 것이다. 일반 국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 부분만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분 쌓기라 하여도 전쟁을 벌이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남측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1950년 새벽 4시를 기해서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남침을 했다고만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호소문을 가져 온 밀사를 돌려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주도 좋게 전향을 시키고 방송까지 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건 도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저자가 박정희 군사반란 정권이 1963년도에 황태성이라는 북한의 밀사를 처형한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 했을까 의문이다.

 

인민군에게 서울이 접수 됐을 때 그리 참혹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전쟁이 발발하고 한강 이남에서는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과 형무소에 있던 좌익수들이 재판도 하지 않고 골자기에 끌려가 떼죽음을 당했는데 당시에 서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쟁 통에 겪은 수많은 고초를 담담하게 쓸 수 있었던 저자는 당시 신분적 우월보다는 참 지식인으로써 자존심을 지켜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어떤 이데올로기도 억압과 폭력을 사용하면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다. 폭력은 인격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코 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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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참여하는 카페에 제가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역사 앞에서' 고 김성칠선생의 책 제목입니다.

 

해방 후 부터 6.25 전쟁 시 인공 치하에 서울에서 살아 온 일기집인데 그분의 아들 역사학자 김기협선생이 다른 분에게 부탁하여 개정판을 냈습니다. 극심한 이데올로기 충돌 속에서 좌, 우에 치우치지 않고 쓴 글이라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책입니다.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에서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충돌을 해결 하는 방법은 전쟁 밖에는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공간과 이념이라는 두 개념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친일파와 이에 반대하는 당시의 지식인 그룹은 섞일 수가 없는 기름과 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당시 인민군이 그리 살벌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보고 상당히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저한 반공 교육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상 검증과 전향 요구 등이 나오기는 하지만 광기의 전쟁 상황을 감안 한다면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월북의 경우 강제가 아닌 상당 부분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 졌음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제 글에 공주대 역사학 지수걸 교수는 댓글이 아니라 RE 다시 '역사 앞에서' 라는 제목의 본 글을 올렸습니다.

 

<역사 앞에서>(충남역사교사모임 자유게시판, 2009. 1. 9)

 

김성칠 선생의 일기가 옛날 창작과비평사에서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지요. 이른바 '인공 시절'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을 서술한 대목, 이후 역사연구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저는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경험은 지극히 편협하고 편향된 기억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제가 소시적 옆에서 지켜본 강진철교수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대목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년부터 계속 영동지역 한국전쟁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를 채록하면서 <<결과보고서>> 정리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저는 김성칠선생이 대면했던 '역사'는, 그의 책을 처음 접했을때의 내생각처럼, 진짜로 '그의 역사'이자 '그의 기억'일 뿐이라는 확신을 더욱 굳힐수 있었습니다. 전쟁 전후해서 영동지역에서만 1천여명의 '민간인'(그중 상당수는 '투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들이 학살되었는데, 당시 사건의 목격자들이나 유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들이 대면했던 '역사'는 김성칠 선생이 대면했던 역사와는 다른 역사였음이 분명한듯 싶더군요.

 

연구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면서 눈물이 나는 걸 참아본 적, 그동안 거의 없었던듯 싶습니다. 하지만 요즘 글을 쓰다가 감정이 격해지는 때가 많습니다. '역사 앞에 선다'는 것의 중압감, 역사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뭔가를 요즘 쬐금 알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마주 대하는 행위 자체의 괴로움, 앞으로 몇일간은 더 괴롭고 그래서 행복한 날들일듯 싶습니다. 설날 잘 들 지내시기 바랍니다.

 

(주) 지수걸 교수는 6.26 때 보도연맹과 공주교도소 좌익수들이 학살된 공주 왕촌 살구쟁이 현장 발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학살현장을 영구 보존하는데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글에 저는 아래와 같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에 개인은 자신이 처한 공간과 시간을 벗어 날 수 없겠지요. 김성칠 선생은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인공의 서울을 지냈지요. 그 때 일기를 쓴 것이고 다음해 51년 고향 영천에 가다가 우익인지 좌익인지 알 수없는 괴한에게 피격을 당해 유명을 달리한 것이죠. 그분도 6.25 전쟁의 피해자 일 뿐입니다. 교수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게 죽어간 사실에 대해서 저 역시 많은 생각과 함께 분노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본 이야기 감사합니다.

 

두 가지 의문은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왜 순순히 인민군에게 넘겨주었냐는 것과 의견이 분분한,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왜 지체를 했냐는 것입니다. 남한당국은 수도 서울을 허겁지겁 빠져 나가느라 그랬고 이후에는 철저히 도륙을 한 것일까요? 남한의 남로당이 총 궐기 하길 기다렸거나, 도하 장비가 없었다고도 하는데 아직 명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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