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6.25는 김구 선생님의 첫 기일

두 아들 아빠 2010. 6. 25. 19:25

불후의 명작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죽음의 숫자로 전쟁의 참혹함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스페인 내전의 추정 사망자는 전쟁으로 30만망, 테러와 보복으로 10만, 기아로 63만이 사망하여 약 100만명으로 보고 있는데, 6.25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그 세배가 넘는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오늘 이날을~” 6.25 동란 노래의 첫 구절이다. 6.25의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본다.

 

 

올해가 6.25 동란 60주년이라서 그런지 영화 ‘포화 속으로’에 이어서 KBS1 '전우‘ MBC의 ‘로드 넘버원’ 등 6.25 전쟁물이 시리즈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천암함 사태를 6.2 지방 선거 일까지 끌고 오다가 이젠 시들해 졌는가 싶더니 다시 6.25 전쟁 일에 안보를 부활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계근무가 가장 취약한 시간은 해뜨기 직전의 새벽이며, 요일 중에서는 일요일이라고 할 수 있다. 6.25 동란은 일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따라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전면전은 시간과 요일에서는 전술의 기본에 충실했다.

 

 

더구나 좀 이르지만 북쪽 지방에서도 모내기가 거의 마친 시기라서 여기까지는 아주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북한 당국이 전쟁을 앞두고 향후 식량 확보와 인력동원을 용이하기 하게 위해서 북한 농민들에게 모내기를 앞당기도록 독려했다는 정보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비껴 갈 수 없는 장마철을 바로 앞두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시기를 잘못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한반도는 교량이 많지 않아서 장마철에 강물이 불어나면 도하(渡河)를 할 수가 없었다.

 

 

북한이 소련에 도하 공병 장비 요청을 했지만 나름 사정이 있었는지 전쟁 개시 전까지 충분한 원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간이나 미적거린 미스터리한 이유 중에 소련의 도하 장비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이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워 제아무리 속전속결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했어도 녹음이 우거진 시기와 장마철 직전에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공격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리한 시기였다.

 

 

갈수기인 봄이나, 장마가 끝난 9월, 아니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할 수도 있었지 않았나 싶다. 갈수기에 다리가 끊겨도 도하에 문제가 없고, 녹음이 지는 겨울철에는 은폐엄폐가 되지 않아서 막강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몰아 부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광이라도 하더라도 참혹한 죽음이 수 없이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 나름의 당위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졸개들도 따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자존감의 부추김과 이에 걸림돌이 되는 유태인 학살을 모토로 삼았다. 전쟁미치광이 김일성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김구선생은 1949년 6월26일 암살되었다. 기일은 고인이 마지막 살아 있던 날로 한다. 그렇다면 1950년6월25일은 김구선생님의 첫 기일이다. 김일성은 그 날을 남한 전체의 제삿날로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게 역사의 기막힌 우연이라고 보자! 그렇다면 그 우연조차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김구선생이 부활 할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