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행복에 항복한 행복전도사

두 아들 아빠 2010. 10. 19. 12:40

행복에 항복한 행복전도사


동반자살이 아니라 살인과 자살


행복전도사 최윤희 부부의 죽음의 본질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살인과 자살이다.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서 법적인 규정이다. 죽여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엄연히 불법이다. 죽은 자에 대해서 유독이 관대한 한국사회에 그냥 동반자살이라고 인정해 줄 뿐이다.


완치가 불가능한 희귀병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사느니 죽은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이상의 고통도 견디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잘 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로 인해서 타인에게 비난 받고, 안 받고를 떠나서 각자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전도의 대상인가?


행복은 절대 가치가 아니고 상대적이다. 그래서 남이 나를, 내가 남을 불행하다고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다. 타인의 행복한 모습이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그와 같은 행복은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독특한 환경과 지위가 있어서 남의 삶을 그대로 대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을 남에게 전한다는 사람이 완벽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자신이 스스로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람 중에는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람들 일 수도 있다.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은 교체되어서 나타난다. 하루에도 이 두 가지 감정을 수없이 느낄 수도 있다. 불행은 억누르고 행복을 부풀려서 나타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보여주기 위한 나와, 진정한 나와의 괴리가 크면 스트레스를 불러오게 된다.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면역을 떨어트린다. 그 기간이 길면 면역력이 완전히 없어 질 수도 있다. 이 때 몸 안에 들어오는 병은 발병 원인을 알 수 없다. 가장 취약한 곳부터 망가질 뿐이다.


결국 돈으로 산 행복


남편의 사업실패로 생활전선에 뛰어 든 최윤희는 승승장구 했다. 한 시간 강의료가 3백만원으로 그 바닥에서 최고의 수준이 되기도 했다. 벌은 돈으로 두 자녀는 외국에 유학을 보내고 그 곳에서 안착하게 하였다. 대개 그 나이 또래 사람 중에서 돈이 있다면 자녀들은 외국에 나가있다. 그 세대의 부모와 자녀가 그러한데, 부모와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윤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으로 산 행복은 시한부 행복이다.


최면술에 가까운 그녀의 행복론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후 도무지 철학적 접근이 되지 않았던, 영혼이 황폐한 시대에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긍정’이라는 화두를 끄집어냈다. 긍정의 미학, 긍정의 힘 등등으로 사람을 현혹한 것이다. 그녀의 행복론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긍정의 철학이다.(이를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에서는 자세히 알면 실망할 수 있으니 멀리서 관조하는 태도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는 내 문제가 아닐 때만 가능하다. 자기 문제는 관조 할 수 없다. 매일 매일 부딪치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 가난이 없다.’ 최윤희는 웃음에 대해서 거의 신앙적 믿음 있었다. 그래서 유서에서도 자녀들에 ‘웃어라!’고 했다. 웃음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억지웃음을 오래 지으면 정작 웃어야 할 때 비웃음이 나 올 수도 있다. ‘가난이 웃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왜 생각치 못했는지 모르겠다.

‘백번의 신음소리 보다는 한 번의 웃음소리가 갖는 비밀을 빨리 터득한 사람이 그 인생을 福 되게 삽니다.‘라고 했던 그녀는 왜 죽음 직전에 웃지 못했을까? 그녀가 잘 나갔을 때 백번의 신음소리를 내야 만 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알려거나 했을까?


‘조건’ 태어난 조건은 내 것이 아니기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태어난 조건 중에서 자신이 취한 유, 불리를 명확히 따지고 하는 말인가!

‘날마다 100퍼센트 최선을 다 하고 사는가? 대충대충, 적당적당, 비틀비틀 사는가?

그것이 바로 인생의 '행복'을 결정한다.‘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 심각함이 보인다.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지 안했다는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편견이다.


행복 그거 얼마예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냄새가 향기가 되기도 하고 향기가 냄새가 되기도 한다.’

생각은 정황과 여건, 예측 등 3차원적인 사고의 결정이 되어야 한다. 내 생각 되로 무엇이 된단 식은 자기 최면일 뿐이다. 최면에서 깨어난 현실은 더욱 혹독하게 느낄 뿐이다.


행복에 항복한 행복전도사

행복전도사는 그녀 스스로 자처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어쩌다 보나 그렇게 된 일이고, 미디어가 만들어 낸 허상을 일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복을 전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믿는다면 대단한 오만과 편견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타인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은 온존이 자신을 ‘열어서 보여 주는 것’뿐이다. 바로 ‘계시’(啓示)다. 계시는 신(神)만이 하는 일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을 온전히 열어 보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부부싸움의 제일 험악한 끝장은 ‘너 죽고 나죽자!’ 다. 최윤희 부부의 결말을 아무리 미화시켜도 그런 식이 되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이혼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요즈음은 의술이 발달하여 불치병의 고통도 통증 크리닉으로 삶을 이어 갈 수 있다. 링게르 주사 줄을 주렁주렁 달고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국 행복한 모습이 아니면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다. 그녀는 남에게는 행복하라고 하고 자신은 행복에 항복한 것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사기를 치고 간일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가혹한 비판은 할 일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뒤를 이를 또 다른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