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일본 지진에 대한 간략한 역사, 사회적 고찰

두 아들 아빠 2011. 3. 17. 11:15

역사의 전환점이 된 일본 대지진


한국인은 전쟁에 초연하고 일본인은 지진에 초월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관문으로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었고 그 과정 중에 일본에 의해서도 많은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일본은 크고 작은 화산 폭발과 지진과 해일이 끊이지 않는 나라인데 역사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지만 어째든, 일본은 대형 참사 전후에 역사의 전환점이 있었다.


일본의 4대 지진


발생일자

발생지역 및 이름

진도

사망자/부상자

비고

1854년 12월

안세이(安政),에도대진진

관측불가

3만6000명

 

1896년  6월

산리쿠 지진 및 쓰나미

8.5

2만 2천명

리히터 개념 이전

1923년  9월

칸토오(關東)지방 대지진

7.9

14만명

 

1995년  1월

고오베 대지진

7.3

6천4백명/4만3천명

 

2011년  3월 11일

간세이 등

9.0

10만명?

 


위 표 외에도 대규모 지진은 아래와 같다.

노비 지진

발생일자 : 1891년 10월 28일

최대진도 : 8.0

인명피해 : 사망 7,273명


쇼와 산리쿠 지진

발생일자 : 1933년 3월 3일

최대진도 : 8.1

인명피해 : 사망 1,522명, 실종 1,542명

(위의 '메이지 산리쿠 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산리쿠 지역에 메이지 시대, 쇼와 시대에 각각 지진이 발생)


토난카이지진

발생일자 : 1944년 12월 7일

최대진도 : 7.9

인명피해 : 사망 998명, 실종 2백여명(추정)


난카이도지진

발생일자 : 1946년 12월 21일

최대진도 : 8.0

인명피해 : 사망 1,330명, 실종 113명


후쿠이지진

발생일자 : 1948년 6월 28일

최대진도 : 7.1

인명피해 : 3,769명


홋카이도 난세이오키 지진

발생일자 : 1983년 5월 26일

최대진도 : 7.8

인명피해 : 사망 201명, 실종 29명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이어서 인명피해규모는 적었지만, 진원지 바로 근처인 오쿠리시토 섬에서는 무려 30미터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다.)


안세이(安政) 대진진(1854년 12월 발생)이후 14년이 지나서 메이지 유신(1868년 1월 3일 ~ 1889년)이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

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에,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변혁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패권 국가를 지향하며 동남아의 수많은 인명을 죽이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 수만명이 죽었으며 1895년 10월 조선의 명성황후가 궁 안에서 일본인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다음해인 1896년 6월에 일본 북동부 ‘산리쿠’ 해안에서 발생한 규모 8.5의 강진으로, 당시 약 2만7,000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만주사변(1931년 9월)을 일으킨 일본이 저지른 가장 참혹한 난징 참살은 1937년 12월 13~17일을 고비로 약 2개월간 30여만명(추정)을 무차별 학살했다.


진주만을 습격한 1941년 12월 7일 같은 날, 일본 본토에서는 진도 7.9의 '토난카이'지진 발생하여 1천2백명 정도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미국의 한 농구 선수가 이번 일본의 지진은 진주만의 대가라고 했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역사를 그런 식으로 플면 연결 점을 찾지 못한다. 만일 그렇다면 미국이 저지른 수 많은 악행에 대한 죄가를 먼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천재지변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도 연관이 있다. 미우라와 구니토모 등 명성황후 시해범 56명은 명성황후 살해 이듬해인 1896년 히로시마 법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다. 이후 49년 뒤인 1945년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는데 명성황후가 죽은 뒤 딱 50년만의 일이다.


칸토오(關東)지방 대지진은 암살설이 난무한 고종의 승하 4년 뒤인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났다. 그 이전에 일본제국은 한반도와 중국을 침탈하였을 뿐 아니라 지진 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내서 6천여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가해자의 집계이니 믿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대륙진출에 대한 열망은 어쩌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기 나라를 탈출하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1995년 간사이 지방 효고현 남부의 고베시를 덮친 고베(한신) 대지진은 당시 인구 150만명의 고베시 도심 반경 100㎞ 안에서 지진이 발생해 고베시에서만 약 4,6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재민은 20만명에 달했다. 사망한 사람은 2005년 12월 기준 6,434명으로 집계됐다. 무려 10년만에 다 파악된 일이다. 당시에 김영삼 대통령이 지원을 제안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


한국에서는 바로 한해 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는데 당시에 일본 T.V방송은 성수대교 모형을 세워 놓고 무너진 부분을 지휘봉으로 쳐 떨어트리며 함께 했던 자들이 모두 깔깔 거리고 웃었다. 천재가 아닌 분명한 인재라서 남이 비 웃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은 같은 해인 7월 7일 사망했으며 그 전후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크게 고조 되었을 때다. 다음해 일본은 고베 지진으로 한반도에 전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의 이번 참사가 우리 경제에 끼칠 영향을 두고 갑론을박을 하는데 남의 참사에 대해서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이 좋지 않다. 다만 고베 대지진 3년 후에 한국은 국가부도사태가 났다는 것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유엔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좌절되었는데 일본의 정권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노대통령은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서 독일은 그렇지 않았지만 일본은 반대했었다.

 

그런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최근에 일본은 다시 상임이사국 진출 의지를 표출했는데 이번에 강진과 쓰나미가 강타했다. 정확한 피해 규모나 사망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10여 만명이 죽거나 실종됐다고 예상하기도 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1945년 일본에 원폭이 떨어지고 66년만에 원자력 발전소의 통제 불능으로 두어 개의 원폭이 떨어진 것과 같은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는 끔찍한 상황이다.


이번 일본의 참사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더 죽어야 한다는 사람도, 아무리 그래도 남의 불행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대한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지표가 있다. 자신이 일본에 직접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번 일본인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했다. 그런 점에서 한류스타들의 일본 돕기는 훌륭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 참사 이후 일본이 어떻게 변화할지 두고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