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링컨 영화 보기전에

두 아들 아빠 2013. 3. 30. 11:25

   기독교 사상은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를 흔들고 바꿔 놓았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놓았고, 미국은 남북으로 갈려 피 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같은 하나님께 각자의 승리를 기도했다. 북에서 넘어 온 기독교 단체인 서북청년단은 민족주의자 김구선생 암살을 시작으로 제주와 남한 일 때에서 인간도육을 저질렀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 악만 남긴 것은 아니다. 예수의 2천 년 전의 아이들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이었고 여성은 남자와 들의 양과 중간 신분에 있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약자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오늘 날 그들의 신분이 완전함을 찾지는 못했지만 예전과 비할 바는 아니며 이를 기독교가 남긴 사상의 전승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어렵다.

 

기독교 사상은 제도권의 교회에서만 전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노무현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아주 유별하고 특별한 경우지만 일반적인 상황으로는 제도권 교회가 아주 어이없는 인격의 소유자를 자주, 결정적일 때 배설하기도 한다.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철학 스승을 김구선생이 아닌 에이브럼 햄 링컨에서 찾았다. 노무현은 2001년 11월에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에서 이를 밝혔다. 그 근거로 정의가 승리한다는 희망의 제시와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자고 하려면 김구선생을 뛰어 넘는 대안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김구선생도 링컨도 암살 당했다.

 

그 책의 서문에서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 는 마가복음 3장 구절을 링컨이 자주 인용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당시와 한반도, 한국의 상황은 유사하다고 했다. 링컨이 노예 해방을 외쳤다면 노무현은 이념 해방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링컨은 미국이 낳은 위대한 대통령이라는데 의문이 없어 보인다. 그는 1809년 2월 12일에 태어나 1865년 4월 15일 56세의 나이에 암살당했다.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이니, 탄생과 죽음은 137~144년의 시차가 있다. 참고로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문을 발표 한 1863년에 조선은 비운의 고종이 왕으로 등극했다.

 

노무현은 링컨과 만남에 대해서 극적인 시기에 극적으로 표현했다. 2000년 4월13일 부산 총선 개표가 있던 세 번 째 낙선의 밤에, 간디가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기차에서 쫓겨나 얼음같이 싸늘한 대기실에서 진리의 순간을 경험한 처럼, 바울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뜨거운 모랫길에서 극적으로 예수를 만남 것처럼, 링컨을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충격을 준 링컨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자신과 지독히 싸워 왔던 조선일보사의 월간조선에서 봤단다.

 

링컨은 어렸을 때 성경책을 읽기와 쓰기 교재로 썼는데 그의 연설문이나 선언문의 구조는 성경의 비유와 배움이 바탕이 되었다. 일직 돌아가신 링컨의 어머니는 유언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숭배하라고 했다. 어렸을 적에 부모의 죽음은 큰 상실감과 어려움으로 남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부모의 유언은 평생 동안 남게 되며 독립심으로 보상 받는다. 누구는 자기 어머니가 정직하라고 유언 했건만... 이제는 그것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링컨은 미국 청도교 정신에 투철한 균형감이 있는 인격자 였고 노무현을 그런 링컨을 통해서 사상을 전수 받았으며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팔아먹은 적이 없는 예수의 참 자제라고 생각한다.

 

노무현과 링컨이 유사한 점은 가난한 시골 출신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그러함에도 변호사 출신이다. 또한 노예해방 세력과 반대 세력,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로부터 공격 받았다는 점이다.

 

먼저 링컨은 노예해방을 주장했지만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전쟁 중에도 연방을 깨지 않으려고 화합을 늘 염두에 두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남군 측에 대한 보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링컨을 암살한 세력이 누구인지 모호하다.

 

노무현은 탄핵 이후에 그 누구도 보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망신조차 주지 않았다. 남북의 대결 구도를 어떻게 하면 평화로 갈 수 있는가를 늘 노심초사했으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거듭나길 소원했고 일관되게 언행 했다.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링컨의 말을 빌렸지만 자신의 뜻과 의지와도 같았을 것이다. “남이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며(노예제도) 우리가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신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노무현은 에필로그에서 링컨에 대한 여러 평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도 말했는데 자신의 소망일 수도 있으며 또한 자신이 받고 싶은 평가 일 수도 있다. 이를 간추린 것으로 글을 맺는다.

 

“링컨은 종종 언론으로부터 독재자, 폭군으로까지 불렸다. 고향의 언론조차 미국의 공직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만든, 가장 간계하고 가장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로 욕을 먹었다. 그런 그가 사후 100년이 되어야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평범하지만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 사람, 친절과 애정과 연민의 정을 소유한, 위대한 도덕적 지도자, 폭넓은 전략적 통찰력과 창조적인 지혜를 가진, 불운한 상황에서 능란한 지도력을 발휘한, 그리고 서투르게 출발했지만 숭고하게 끝낸 순교하는 성자의 고귀한 품성.“

'노무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무현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던 것  (0) 2014.05.23
잠바 노무현  (0) 2012.05.23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  (0) 2010.04.28
노무현이 이상주의자라고?  (0) 2009.10.12
데드 노무현 시대의 환란  (0) 2009.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