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행복한 척 하기

두 아들 아빠 2014. 3. 10. 13:00

행복감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비교 우위와 열세에 따라 좌우된다. 자신과 비교하여 남의 행, 불행을 규정짓기도 하는데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지독한 비교도 있다. 그 타인은 이웃이 아니라 분명 없애야 할 적일 것이다. 이웃을 가장한 적들이 널려 있는 세상이다. 이웃은 적도 되기에 애초에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어렵다고 내색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 불행이 타인의 행복으로 전위되는 것을 가로막겠다는 처절한 심산도 있다. 여러모로 참 어렵게 사는게 인간이다.

 

한국의 수많은 자서전이 어이 없는 이유는 많은 고난이 있었으나 다 이겨내고 결국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 때문이다. 이른바 예수환자들이 하는 '간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론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은혜를 받아냈다는 악다구니를 순화시킨 것이다. 성자 예수는 그렇지 않았고 진정한 위인의 결말도 그렇지 않았다. 링컨, 김구, 노무현이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선을 추구하고 악과 대항했지만 악이 자기 몸을 관통하는 것을 허용했다.

악에게 당했다고? 그러면 도무지 예수를 알 수 없다.

 

남이 보아 분명히 어려운데 그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 한국교회다. 선한 척 잔잔한 웃음까지 띄어야 한다. 인상을 찡그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 낙인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자주, 길게 되면 나름 내공이 쌓이는데 이를 통해 자기 안의 무지와 욕심, 그것들로 똘똘뭉쳐진 고집을 깍아 내지 않으면 몸과 마음은 골병이 든다. 깜량도 안 되면서 위인을 가까이 하는 이유는 인류의 대표격인 그들을 보면서 내 무지와 욕심을 깨우치고 고집을 깍아내야 위함이다.

 

불행한 척 하지 않는 것만도 괜찬다. 정녕 행복한 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정도가 심하면 타인에게 희망을 주는게 아니라 절망을 안겨준다. 타인의 절망이 나의 희망이 되서는 안 된다. 그건 깨우침도, 깍는 것도 아닌, 자기 병을 더 깊게 한다.  어떻게 보면 상처에 약을 바르지 않고 고추가루나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다. 차라리 어느 정도  표정 관리가 될 때까지 잠수를 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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