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취미

세월호 사건은 인문학의 부활

두 아들 아빠 2014. 7. 26. 10:21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대한민국에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우선 제목이 '바다와 세월'이다. 끝없는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멋지게 관통하는 제목이다.

부재는 '침몰! 알수 없는 비밀' 이다. 선원 전원과 기록. 배가 있는데 왜 사고가 났는지 모른다고 한다.

 

'구조와 구원' 자력 구조와 구원이 무엇인가를 삶과 죽음을 갈라 보여주었다.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앞에서 가만히 있으리!" 이거 개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구조와 구원은 다 말로써 이루어진다. 앞에 구조는 '탈출' 뒤에 구원은 '복음'이다.

 

남편이 죽으면 과부나 미망인, 아내가 죽으면 홀아비, 부모가 죽으면 고아라고 한다. 그런데 자식이 죽으면 존칭이 없다.

그냥 유가족이라고 한다. 그 유가족을 화나게 하고 조롱까지 한다. 그들은 길거리를 해메고 곡기를 끊고 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1박2일을 걸어서 편지를 전해주어야 하는가!

소돔과 고모라도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배안에 숨진 사람들을 꺼내는데 그야말로 '세월아 내월아' 였다.

'사건이 일어 난 날 공주의 알 수 없는 7시간' 공주의 비밀은 언제 풀릴까? 그것이 알고 싶다.

 

사건의 책임을 몰아가는데 있어서 자본과 종교를 함께 엮어 넣었다. 우리 시대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종교에서 이단 문제는 영원한 화두다. 이름하여 '청해진과 구원파'다. 바다의 역사적 요소와 종교의 타락을 엮었다.

 

사건이 너무도 참혹하니까 순화시키려고 했는지 동화적 요소도 끌어 들였다. '벽장안에 숨은 구원파 괴수'

극은 극적이어야 하는데 노인은 마지막까지 실망시키지 않았다. 말 없는 사체는 엄청난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노인이 사투를 벌여 잡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상어가 다 뜯어 먹는 '노인과 바다'로 몰아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도 역시 세계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에서 소년은 죽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의 희망적 요소는 당연 소년이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바다에 때로 묻었다. 이게 통탄하게 슬픈 일이다.

 

사건을 한 장의 그림이라고 하면 그림 전체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순서도 없이 퍼즐 조각 하나씩을 꺼내 놓고 있다.

언론도 적극적으로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스무고개를 하자는 식이다.

이건 분명 조작이 있다는 뜻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자기들이 그린 그림이 전혀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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