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방, 농촌

하류지향

두 아들 아빠 2016. 4. 1. 08:00

이 책은, 1.공부로부터 도피하기(20) 2.리스크사회의 약자들(11) 3.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13) 4.어떻게 도울 것인가(17) 네 단원으로 되어있는데, 각 소단원 (장)은 평균 네 페이지 이하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하류지향적 현상에 대해서 개인과 가정, 학교, 사회, 문화 등에서 증상과 원인을 통찰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쉬운 점은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가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너무 적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의 개인적인 성향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본사회가 더 이상 가정에서 뭔가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공부를 혐오하는 아이들이 나타났다고 어두운 배경의 서막을 연다. 저자는 일본의 하류 지향의 원인을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주원인으로 뽑았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하류지향은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었던 상황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삶에서 모르는 게 있어도 개의치 않으며 자기 학력 저하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맞춤법을 모르는 문과 대학생, 분수 나눗셈을 하지 못하는 이과 대학생이 생겨났다. 문제는 더 이상 학력이 취직의 보증수표가 아니며,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점점 더 노력할 동기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미래를 헐값에 파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노동의 주체였던 아이들이 이제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교육도 소비자 입장에서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권리에서 의무가 된 ‘교육’은 아이들에게 삶의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현재 학교 교육은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공부이지, 산업화가 퇴조하는 현재와, 미래에 펼쳐질 시대를 대비한 교육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아쉽게도 교육내용과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 기존의 틀에 계속 쑤셔 넣으려는 기성세대의 고집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존 교육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학교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 교육의 결과를 수치화하고 졸업생을 제품으로 간주하는 시장주의적 교육관이 깊숙이 들어 왔는데 배움의 의미를 모르면 노동의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공부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일본사회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사회문화적으로 여럿 통찰 중에서 내용의 골격을 이루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리스크 헤지’, 두 번 째는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이다. 마지막으로 ‘균질성과 다양성’에서 찾은 인간연구와 사회현상이다.

우치타 타루츠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여 설명도 하고, 하나로 엮어 내기도 한다. 저자의 독특한 서술 방식인데 통찰을 확장하고 극대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리스크 헤지’는 파산을 막고 현상유지를 목표로 여러 의견을 모아야 하기에 귀찮고, 복잡할 뿐 아니라 결국은 서서히 몰락하는 것이라 자본주의의 사업 목표로는 적합지 않지만 인구감소라는 대전제 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대비해야 한다. ‘자기를 찾는 여행’이라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안전망을 해체하고 자신의 리스크를 증대시키고 있다.

공정하지 못한 능력주의 사회는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자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을 들이댄다. 이런 구조 하에서 벌거벗은 개인은 고립무원의 벌판에 홀로 서게 된다. 반면에 출신 계층이 상위인 강자들은 획득한 이익을 독차지할 뿐 아니라 ‘늠름하고 유연한 개인’으로 칭찬 받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은 자기결정을 포기한 대가로 기회를 얻는다는 점이다.

 

은둔형 외톨이라는 ‘니트족’은 프랑스의 경우는 계층화 때문이고, 일본의 경우는 균질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부모의 성공 경험을 자식세대에 강요하는 것이 균질화의 개인적 압박의 시작이며 미국은 애초에 다양한 인종이 이룬 사회였기에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시작하였다. 균질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이는 사회 구성원이 비슷해져서 설명하기 위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환상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배우는 동안에, 어쩌면 배움이 끝날 때까지도 공부의 유용가치를 모를 수 있다. 소비의 주체자들은 배움도 구매행위로 보아 유용성과 등가가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공부는 왜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하는데 예전에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 집에서 하는 ‘노동’은 (둘 다 영어로 Work인데) 동일하다. 내가 일을 안 하면 부모나 형제가 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뭐가 좋아요?” 라는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보모들 중에 자식이 내는 도움의 신호에 귀를 닫아버리는 경향이다. 이는 실패를 인정하기 싫을 것과, 자녀를 하나의 제품으로 취급하고 성과주의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배움은,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라고 한다. 저자는 나름의 해결책으로 아이의 성장을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한다고 한다.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고 집에 돌아 올 때 인상을 잔뜩 쓰는 아버지는 가족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 아버지의 인상 씀을 자녀들은 그대로 따라함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런 구조 하에서 가족 간에 친밀감이란 발현할 수 없다. 가족 안에도 고립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존경하는데 생기는 기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어른들과 보모가 누군가를 존경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존경심을 가질 수가 없다.

장지문 하나를 갈라서도 함께 살 수 있었던 공생의 신체 능력을 회복하여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공동체 해체가 개인의 리스크 증대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안전망을 무너트렸다고 진단한다. 예전에 우리사회에 있었던 계모임은 주고받는 거래를 근간으로 하지만 어려워지면 돈을 들고 튈 최종의 안전망 역할도 한 순기능적 공동체 였다.

 

책의 표지에 있는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적 통찰’이라는 소제목이 무색한 함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가 쓸고 간 황량한 들판 같다. 다음세대는 그 벌판이 누구 때문에?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를 뿐 아니라 더 지나면 ‘황량함’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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