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조상사의 전쟁

두 아들 아빠 2017. 6. 17. 22:57

   “김하사! 이리와” 중대인사계 정상사가 소대원과 함께 낫질을 하고 있는 날 부른다. 작달막한 키에 약간 붉은 빛이 도는 동그스름한 얼굴, 큰 소릴 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월남참전 용사다. 특전사에서 사고치고 온 선임하사들은 물론, 역시 특전사 출신 중대장들도 인사계를 깍듯하게 대했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카리스마가 나 올 수 있을까 엄청 신기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다른 병사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애들 낫 주고 너 하지마!” “네” 하고 분대원에게 낫을 주고 뒤 돌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제대를 앞둔 중대 최고참 하사가 얼마나 엉성하게 낫질을 했기에 그랬을까! 좀 쪽팔렸다. 소대에서 사격, 무장구보, 산악급속행군, 특공무술 등 어느 것 하나 뒤쳐지지 않아서 하사로 차출 되었다. 그런데 낫질은 젬병이었고 더덕 한 뿌리 스스로 못 캤다. 나 뿐 아니라 대개 서울 놈들은 한 손에 더덕 잎을 들고 다니면서도 그 흔한 더덕을 잘 찾지 못했다.

 

처남 될 용준이의 졸업식에 가려던 참인데 하늘이 낮께 깔리고 잔뜩 흐리다. 밝은 곤색 양복을 입으려다 모자 달린 점퍼를 걸치고 집에 있는 우산 중 제일 큰 것을 골라 나섰다. 첨 뵈는 장인, 장모 될 분을 만나는 날, 비가 온다고 자기 편한 옷을 입는 스물아홉 살 때의 나였다.

 

10월 말 제대하는 날 강원도 화천 골짜기는 영하 5도였다. 육군 규정에 내복과 야전잠바는 11월 이후 제대자들에게 준다고 되어 있다고 인사계 정상사는 입고 있던 내복을 벗고 가란다. 그 덕에 사단 보충대에서 대기하는 삼 일 동안 난다 긴다는 수색대대 하사출신이 패잔병처럼 모포를 둘러쓰고 지냈다. 다른 부대 제대자들은 내복 물론 야전잠바에 깔깔이까지 끼워 입고 있었다. 조상사는 처남이 대학을 다니는 내내 등록금을 십 원짜리까지 딱 맞춰서 보내셨다고 한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전쟁은 기억력 싸움으로 발발한 것이 많았다. 도발의 시작은 언제나 어머니 쪽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해서 늘 당하는 편은 아버지였다. 선운사 근처 간장게장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예전에 누군가 크게 아팠다고 한다. 대화가 좀 이어지는가 싶더니 누가 병원을 데려갔냐! 에 대한 시비가 붙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 앞에서 분노를 폭발하셨다. 이런 상황을 조장한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보내시는 사인은 항상‘내가 이런 사람과 산다!’ 였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기억력 가지고 다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닌 것 같아도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 말이 맞다고 따르라는 것이다. 나중에 자기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 너그러운 선배나 어른이고, 반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고집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란다.

 

월남에서 실전을 경험한 정상사 눈에는 전방 수색대대가 실시하는 강도 높은 훈련이나 DMZ 내에 중무장을 하고 수색, 매복 작전도 애들 병정놀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정상사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년 중 행사인 ‘김장’이었다. 요즈음 군대야 김치를 담그지 않지만 그 때는 군대에서 거의 모든 걸 해결했다. 저장 무를 다루는 조, 무와 배추를 절이고 씻는 조, 양념을 버무리는 조, 이 엄청난 양들을 운반하는 조 등등, 수색대대에서 하는 어떤 군사훈련과 작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지휘했고 직접 시범을 보이며 자리를 뜨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일 했다. 죽고 죽이는 것도 전쟁이지만 먹고 사는 것도 전쟁이었다.

 

조상사는 팔순 때까지 매년 다섯 자식에게 보낼 김장까지 다 담으셨다. 어머니와 단 두 분이 서 말이다. 어느 해부터 인가 육젖 냄새 진한 김장김치를 보내지 않으셨다. 아마도 힘이 부치신 것일 꺼다. 그 몇 해 전에는 피보다 진한 복분자 술도 끊어졌다. 고창 한우 육회에 선운사 복분자주를 함께 먹고 마셔보지 못한 사람은 식물의 선혈과 동물의 선지가 내는 핏빛의 오묘한 어울림을 알 수 없다.

 

처남은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사라지고 조상사와 그 부인, 내 마누라 될 사람 넷이 명륜동에서 명동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분위기있는 경양식집에서 국산 양주를 시켜 놓고 어색하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기운에 대화가 이어졌고 2 차는 신촌으로 자리를 옮겨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메뉴가 꽃게찌개였는데 조상사는 너무 비싸다고 한 말씀하셨다. 그 이후 꽃게 철에 고창에 가면 구수한 된장을 조금 푼 들큰한 꽃게찌개를 꼭 내오셨다.

 

술기운도 불콰하게 오르고 배도 적당히 부른 시점에서 조상사께 넌지시 사우디에 가기 전에 간단히 약혼식을 했으면 어떻겠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갔다 와서 보자고!” 찍소리 못하고 아까보다 더 공손히 두 손으로 술을 따라드리고 화장실로 가서 담배를 한 대를 피워 물으며 속으로 소리쳤다.

‘그래도 오늘 성공했다!’

 

대게의 병사들은 군대 비리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하사만 달아도 비리가 널려 있었다. 죄송스럽지만 조상사는 입대를 이승만 정부 때 했지만 박정희 시절에 주로 복무하고 1979년도에 제대했으니 1차 반란군 편입 출신이고 난 1980년 초 중반 전두환 때 했으니까 반란군 2기 출신이다. 반란군을 다른 말로‘괴뢰군’이라고도 한다.

 

하사관 교육대에서 8주간 동안 월급이 두 번 나왔는데 130명의 하사관 후보생 월급이 다 내 배낭 속에서 독단적으로 운용되었다. 당시 단풍하사는 병장 월급보다 약 1.5배 더 받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도 내 월급을 왜 안주냐고 항의하거나 묻는 군인이 단 한명도 없었다. 괴뢰군이 달리 괴뢰군이 아닌 이유다.

 

조상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논산훈련소에 근무했을 때 돈이 나올 턱이 없는 정수장 담당을 했는데 위에서 뇌물 요구 압박을 견딜 수 없을 정도 였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이 알고 있던 논산훈련소 내 비리를 낫낫이 기록한 것을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 너무나 적나라해서 덮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관련자 전원과 훈련소 소장까지 문책을 받는 등 큰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아버지는 군대 말년을 고향인 고창 부대에서 PX관리관으로 지내셨다.

 

월남전 용병과 반란군으로 살아오시면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부딪힌 것에 비하면 내 용감함은 연속성이 없었고 대체로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이 비겁함이 엉뚱하게도 장모님께 터진 적이 있었다. 하루는 장모님이 말씀하시길 베드민트 모임에 나오는 초등학교 교감 출신이 있는데 말도 조근 조근하고 인격적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에 비하여~

그럼 그러려니 했어야 했는데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전 인격적인 척하는 비겁한 인간들보다 세상을 용감하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더 존경스럽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내말에 따로 말씀이 없으셨지만 속으로 그러셨을 것이다. “끼리끼리 잘 논다”

 

난 아버지가 교제 장애가 있는 것처럼 평하는 것에 단호히 거부한다. 장애는 아버지가 아니라 비굴하게 살아 온 보신주의자들에게 있다. 결국 자기가 험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척하는 인간들과 희희낙락 주고받는 대화가 도통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입관 전에 어머니 당신의 살풀이에 가까운 모노 극을 지켜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 버렸다. 감동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비상 걸러서 군화 끈 메고 나가는 당신이 걱정되어서~~”대목에서는 나뿐 아니라 현역 군인인 두 아들 모두 울컥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의 살풀이 극을 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마누라한테 죽을 때까지 잘해야 겠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의 모노드라마는 대 성공한 샘이다.

 

내 육신의 아버지는 20살 봄에 돌아가셨다. 성인으로써 이성적인 대회를 나눠 보지도 못했다. 이후 10년이 안되어 아내의 아버지인 조상사가 내 아버지가 되었다. 작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27년 동안 내 아버지셨고 용감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으셨던 믿음직한 군대 선임이셨다. 누구보다도... 나도 슬펐다. 그래서 장례식 내내 많이 울었다.

대한민국에서 용감한 군인은 현충원에 묻힌다. 아버지도 그랬다. 엄숙하게 치러지는 헌충원의 합동장례의식 도중에 군인인 둘째 아들 현석이가 옆 사람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삼류 신파 좀 그만하세요!”

 

우리 김씨 집안 5남매 중에서 장인이 있었던 사람은 딱 두 사람이다. 큰 매형과 나다. 난 장인어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장인이 될 수 없다. 아들만 둘이기 때문이다. 큰매형이 아버지를 처음 뵙고 소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닯으셨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뵙고 정상사를 떠 올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성함이 너무나 유명한 목사님과 같아서 가려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언행은 그분 앞에선 영락없는 하사였던 것 같다. 좀 용감하고 의리있는 척하는... 그런 나를 좋아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전 할 것이 있다. 신혼여행 다녀오고 처가에 인사를 갔는데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이제 고창에 혼자 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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