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경 쟁 에 관 하 여

두 아들 아빠 2005. 8. 22. 16:38
 

경 쟁 에  관 하 여


- 목  차 -


1.경쟁이란? 

  1)경쟁의 어원

  2)경쟁의 종류

  

2.사회현상 속의 경쟁

  1)경쟁의 양상

    가정 - 학교 - 사회 - 국가 - 세계

  2)경쟁의 피해

  3)경쟁구도는 누가 만들었고 그 유익은 누가 차지하는가?


3.결론

  

참조 및 인용

 

『성경』


『생명과 자치』김 지하   p200~202. 김 지하, 『틈』, p33.


『경쟁의 한계』 리스본 그룹(The Group of Lisbon)지음, 채수완 옮김, 바다출판사,                                                                     2000년

『경쟁의 한계를 읽고』 조 순자의 기사내용(2004.12.29)


『형제란 이름의 타인』 양 혜연, 2001, 올림출판사

『다음 블러그 발도르프 아줌마』‘12학년 졸업발표회’ 중에서


『어설픈 경쟁』  장 자끄 상뻬


『지구화의 길』울리히 벡,


『생명의 그물』프리쵸프 카프라는




1.경쟁이란? 


  경쟁(競爭)이란 한자로 겨룰 자에 다툴 이라 쓴다. 겨루고 다툰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 ‘서로 앞서거나 이기려고 다툼‘이라고 설명되어있다.

라틴어 어원은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해 함께 추구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국어 쪽의 '생존 경쟁'은 일본어 문장에 나타나는 한자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결과여서, 이 복합어가 일본어에서 유래했음을 암시해 준다.

이 새로운 복합어는 1930년대 말, 문세영의 『조선어 사전』에 처음으로 채록되었다.


  인간 세상을 경쟁의 구도로 확신하는 사람이 많다. 시대에 따라서 생존 경쟁, 무한 경쟁, 글로벌 경쟁. 시대에 따라서 접두 문구를 바꾸어가며 세상을 끊임없이 경쟁구도로 몰고 가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초일류라고 자칭하는 기업 연구소의 논문제목 만 보더라고 경쟁의 구도가 어디까지 와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중 최근 논문 몇 가지만 소개한다.


미래의 경쟁 우위 - 소프트 경쟁력

전략적 경쟁 우위 - 무한 경쟁 시대의 생존 전략

IT산업과 표준경쟁

심화되는 특허 경쟁력과 전략적 대응

근로시간 단축과 경쟁력

숨겨진 경쟁력 - 스피드 경영

전략 서비스산업과 경쟁력 강화방안

 

위 논문의 제목을 읽어 내려가면서 숨이 막히는 사람은 경쟁적이지 못한 것 같다.

가정에서부터 학교, 기업, 사회, 국가간의 잘못된 경쟁구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2.사회현상 속의 경쟁

 1)경쟁의 양상


『 가정 』

   

  부모가 세상이 경쟁구도이며, 그 경쟁에 이겨야 생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의 발단은 가정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제간 경쟁은 정상적으로는 가족 내에서 아기가 새로 태어났을 때 형(누나·오빠 또는 언니)이 자기의 위치를 아기가 대신 차지할 것을 두려워하게 될 때 시작된다.

형은 극단적으로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아기에 대해 공격적 행동을 취하거나, 이불에 오줌을 싸거나 아기처럼 말하는 등의 퇴행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퇴행적 행동은 형이 부모에 대한 자신의 의존적 역할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이다.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형제간 경쟁은 극단적으로 경쟁적·공격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생활경험(예를 들어 직업상 경력)에까지 일반화될 수도 있다.


  형제간 경쟁은 결코 보편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며, 때로는 경쟁적이기도 한 자식들의 욕구에 대해 부모가 어떻게 균형을 잡아나가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흔히 생각 없이 “넌 왜 형(또는 동생)처럼 못하냐?” 한다. 듣는 이의 반발심은 고려하지 않은 말이다. 이에 대하여 부모는 “단지 좋은 본보기를 말 해준 것뿐인데........”라고 생각한다.  이는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편애를 도구로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시초이다.


  잘못된 형제간의 경쟁구도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편애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간에 심각한 관계가 형성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성장하여도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면서 부모는 눈을 감기 전에 유언으로 “너희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 가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이야기 인가?


  성경에 나오는 형제간의 이야기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을 두 가지를 뽑으라고 하면 ‘가인과 ‘아벨’,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 이다.

이들 형제의 문제는 형제간의 시기심과 부모의 편애이다. 결과는 인류 최초의 살인과 이에 버금가는 형제의 버림 사건이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형제라도 각기 성향과 능력이 다를진대 검증되지 않은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그 기준은 바로 학교의 시험 성적이고 등수이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는 “경우 바름”과 어머니로부터는 “인정머리 있음”을 배워야 한다. 학교 성적에 매달려 정작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제처 두고 먹고 살기 위한 기능적인 면만 몰고 가는 것은 아닐까?


  왜 인간이 어미 사자의 새끼들의 우성 판별 방식에서 자녀 교육의 교훈을 얻으려고 하는가? 이처럼 동물의 양육강식의 법칙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이미 인간임을 거부하고 창조주의 뜻을 반역하는 행위이다.



『 학교 』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온당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는 역시 남을 배려하고 보살필 줄 안다. 이런 최소한의 가정 내의 교육이 이루어진 다음에 학교라는 제도권으로 가서 또래끼리의 사회를 익히는 것이다.


  요즈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등학교에서는 등수를 매기는 성적표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쪽지 시험과 학년말 시험을 통하여 성적을 중심으로 한 차등구도는 엄연히 살아 있다. 그래서 기초를 든든히 다진다며 어린초등학생을 밤늦께 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일을 우리 부모들은 서슴없이 수행한다.


  국가가 주도하는 학교교육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학부모는 없다. 다만 현실이 그렇고 대안이 없기에 따라 갈 수밖에 없을 뿐이다.

교육의 본질과 아이의 올바른 성장을 살피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유치원 -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교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학교 제도에서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는 마치 대학을 가기위한 준비단계 쯤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명문 대학에 자녀를 보내는 일만이 부모로서 ‘가치 있는 보람’이라고 굳게 믿는다.


  인간의 삶과 세상 논리를 이보다 더 단순하게 볼 수는 없다.

학교가 제시하는 과제에 관하여는 학습 능력에서 개인 차이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이는 학교 공부를 잘하고 시험을 잘 치루는 능력은 개인적으로 분명히 구분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게으르고, 머리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


  40대의 나이에 교사직을 접고 자녀 유학과 함께 독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는 ‘발도르프 아줌마’(닉네임 차름이)의 경쟁에 관한 비교적 본질에 접근 하려는 의견을 소개하고자 한다.


『경쟁만이 서로를 발전시키는 것일까?

우리는 경쟁이라는 구조를 심지어는 '선의의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켰으며 경쟁사회, 경쟁교육, 모든 것은 경쟁으로부터

시작되어 경쟁으로 끝납니다.

왜 죽는 것은 경쟁적으로 죽지 않은지...........................


그렇다면 경쟁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경쟁에서 패배할 수 있을 가능성 때문일까?

패배를 두려워 한 나머지 경쟁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저는 경쟁이라는 것은 같은 능력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쟁이 과연 이루어 질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경쟁 논리와 잣대로 인간을 설명한다면 이미 인간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 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각자 타고난 저마다의 것들이 다릅니다.

저마다의 개별적인 개성과 능력과 특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 아이들은 불행해지고 부모도,

교사도 갈 길을 몰라 해매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 중략 ~


이 세상에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했듯이

승자와 패자의 논리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아니, 발도르프교육이 그러한 승자와 패자의 논리를 위해서

매진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경쟁을 하는 동안 강퍅한 마음과 자신의 스트레스를 먹고 자란 갈등구조 속에서 타인을 억압하며 밟고 일어선 승리자는 찰나의 쾌감만을 느낄 뿐이다.

경쟁구도에서 영원한 절대적 우위는 존재하지 않다.

  

  과연 학교 성적이 뛰어나서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이 경쟁에서 이긴 승자로 끝까지 존재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 사회 』

  인생의 중반기를 넘어선 사람에게 자신의 주변에서 공부 잘하던 사람이 현재 모두 잘 되었나를 질문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의 예가 더 많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현재위치에서 돌아 볼 때 언제 경쟁에서 이기고, 졌는가를 말해 보라면 딱히 꼬집어 내지 못한다.

예전에는(왕년에는) 그럭저럭 잘 나간 것 같은데 요즈음은 영 시원치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사람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업이던지 단계와 분업이 있다. 그걸 굳이 계층이라고 해도 무관하지만 아무튼 자기 영역에서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완성차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고, 부품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법원에는 판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서기도 있고 경리도 있다. 굳이 이것을 경쟁구도로 몰고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등수에 집착하는 민족도 드물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급속히 되었다. 아마도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사관학교를 1등 성적이지만 조선인 이어서 2등에 머무른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거기에다 정권까지 잡고 나서는 등수 매김 놀이를 마음 것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새마을 완성도 전국 몇 위, 재계 서열 몇 위, 세계 몇 위, 등등 별 효용가치도 없는 등수에 목숨을 걸고 뛰었다.

등수 매김도 원칙이나 진정한 가치를 기준으로(등수 매김의 진정한 가치 기준은 없다.)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매출액 대비 순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의미가 없는 일이다.  대우가 이런 구조 속에서 부실을 키워 왔고, 그 피해는 국민 모두가 고스란히 받고 있다. 워크아웃 이전의 대우는 이윤이 줄더라도 매출을 올리는 처절하게(?) 등수 관리에 힘썼다. 장사꾼이 장사는 안하고 분식회계로 등수 매김에만 신경을 쓴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화두는 ‘경쟁력’으로 보인다. 치열한 적자생존의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대의 무기는 바로 ‘경쟁력’이며, 경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렇듯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경쟁력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살벌한 경쟁이라는 말보다는 ‘웰빙’이라는 그들만의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들은 경쟁에서 승리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 국가 』

  우리가 사는 오늘, 먼 옛날 우리선조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들이 무수히 펼쳐지고 있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국가간 교역이 활발해지고 이미 국경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문화 전파와 확산도 용이해져 지구촌의 모습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전지구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실시간으로 각 나라의 정치, 경제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수주의가 엄연히 살아있다. 

산업화의 급물결이 농경사회의 은둔적이며 정적인 삶에서 개방적이며 활동적인 삶으로 변환되었으며, 서로 다른 능력과 위치에서 상생하며 살아가던 인간의 삶을 경쟁이라는 구도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국가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끔찍한 대규모 살상 극을 서슴없이 벌이기도 했다. 유엔이라는 기구의 설립목적은 세계평화라는 대의명분으로 탄생했지만 그 실상은 몇 개의 강대국의 질서 아래 세계를 수직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국지적인 분쟁을 유엔이라는 이름 하에 원만히 해결 한 경우가 거의 없음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는 이른바 유엔을 결성한 상임이사국인 강대국 간의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서 이다.


  종교전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경쟁구도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신이 더욱 진실하다는 주장으로 남을 힘으로 억누르려는 것이고, 이에 반작용으로 테러라는 극단적인 항거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믿는 신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왜곡하여, 신을 핑계 삼아 죽음의 경쟁을 하는 것이다.


  유럽의 EU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같지만 자격을 갖춘 자기들끼리의 연합으로 거대한 하나의 경제 대국을 세운 것에 불과 하다. 지역에의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세계를 상대로 경쟁을 벌리자는 의도일 뿐 이다. 본질적으로 불순한 의도는 그 결과를 보장받지 못한다.

유럽연합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프랑스에서 EU헌법 비준의 실패로 난관에 봉착 했다. 네델란드까지 합세하여 존립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이 연합 이후 살기가 나아진 것이 없다는 불평이 무엇보다 큰 문제를 예고한다.

EU로 각국가의 책임자는 국정운영의 실패를 빗겨 갈수 있고, EU의 관료주의는 자기들 끼의 정책 정책결정으로 유럽인들은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국가간의 경쟁의 양상은 이제는 전쟁을 통한 우열보다는 경제적인 우열 다툼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비확산 경쟁은 여전히 이루어지면서 강대국의 제3세계에 대한 경제적인 침탈을 꾸준히 자행하고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의 은전(恩典)을 기다리는 것은 권력자가 그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기를 바라는 허망한 일이다. 

인류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더욱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국가간의 경쟁구도가 사회와 가정까지 강박적인 경쟁의 사고를 고취 시킨다. 학교 교육은 국가간의 경쟁의 구도에서 싸울 전사를 기르기 위한 프로그램을 짜고, 가정에서도 자연히 이에 맞추어서 양육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런 구조에다 과열된 내부 경쟁을 더 얹은 형국이어서 우리의 자녀들은 영혼과 육체가 고통속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 세계 』

  세계화의 흐름으로 인해 각 나라에서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권력구조가 강화되면서 더욱 경쟁의 파급효과가 확산되고 있다. 지금 세계는 원래 어원의 뜻과는 무관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상생을 위한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해 함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밟고 올라선 강한 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경쟁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자유시장 경제 체제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놀라운 정도로 세계를 잠식해가면서 ‘경쟁력’은 전 지구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경쟁력 강화’라는 말 앞에서는 사회의 민주적 절차와 합의도, 지속가능한 자원개발도, 환경보호라는 구호도 무색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곡된 경쟁논리를 합리화하는 세계화 확산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리스본그룹에서 발간한 ‘경쟁의 한계’는 경쟁구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세계화 확산의 원동력을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시장개방을 통한 자유화추세이다. 국내시장을 개방해 상품, 서비스, 인력, 자본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민영화의 확산은 민간부문의 투자나 기금조성을 통해 시장의 수급여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해 수익구조를 변화시키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 국가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규제완화로 지구화 추세가 심화될수록 개별정부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국가의 독점권 행사나 시장개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관계법령이나 기준마저도 그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든다.

예를 들어서 대형 할인 마트가 유통구조 개선과 물가안정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그린벨트 내에도 건축을 허가 하는 행위와 경제특구 등이 있다.


  이렇게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세계화의 급속한 전개이후 많은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기초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복지제도들이 무너지는 것이다. 독일과 영국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회안전망에 대한 재정지출을 줄이고 행정규제 완화, 소득세 및 법인세 감면혜택을 부여하고 임금 신축성을 높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통신수단을 사유화하고 노동조합의 역할을 축소하면서, 기업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환경규제를 완화하였다.

이후 1960년대 말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로 세계공황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자 다른 나라들도 복지축소를 선택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형태로든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지출의 최소화와 공공복지 정책의 축소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 복지재정을 줄이고 임금 신축성을 높인 다는 것은 바로 서민층, 빈민층의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경쟁의 피해

  완전고용 정책이 더 이상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사회보장제도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개인은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혼자 투쟁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들에 의하면 경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킨다는 사회적 반항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 기능 자체의 구조적인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도한 경쟁의 부정적인 효과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인간이나 인적 조직보다 도구와 기술적 시스템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2. 인간은 생산자와 소비자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3. 단기적인 금융비용에 우선권을 두게 되고 과잉생산과 빈부격차를 확대시킨다.

4. 국내시장보다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집중 현상이 벌어진다.

  (그 결과 지구촌 차원의 과점적 시장구조가 탄생한다)

5. 지역적, 계층별 불평등이 조장된다. 배제된 지역에 대한 무관심이 일어난다.

6.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구촌 환경파괴가 가속된다.

7. 노동규제와 사회 복지프로그램이 약화되거나 서서히 해체된다.

   (대량 실업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된다.)

8. 공공부문의 영역이 축소되고 대의민주주의가 훼손된다.

9. 개인, 기업, 도시, 국가에서 경쟁력이 없는 행위자는 더 이상 역사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단지 ‘패배자’라는 이유만으로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 경쟁력 강화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벌려 놓으며, 환경이 파괴된다는 논리이다.


  

3)경쟁구도는 누가 만들었고 그 유익은 누가 차지하는가?

  동양의 철학이나 사상은 경쟁을 고취 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멀리 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과거에 “시기”라는 낱말은 써왔지만 “경쟁”이라는 낱말은 잘 쓰지 않았다.

  

  서양 사람들은 무한경쟁의 논리를 다윈의 진화론에서부터 배웠다. 다윈의 진화론은, 서양인들이 자연의 생태계에서 보고 배운 삶의 논리다.

그들은 자연의 생물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그렇게 보았으며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진화의 원리를 끄집어내어 자연도태,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원칙을 이론으로 정립해낸다. 이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최고만이 살아남는다는 <경쟁의 논리>로 만든다.

그러기에 최고가 아닌 사람은 희생된다. 아니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는 차가운 계산의 논리, 이성의 논리이며 매우 합리적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80%의 사람들은 못 살게 되어있다. 나만 이 80% 안에 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문화가 꽃피운 서양에서 한쪽에서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적 논리를 펴고 있던 것이었다.


  20세기 초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그들은 허울 좋게 “소비는 미덕이다”라고 외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 필요 없는 물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구입하도록 보이지 않게 조장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간단한 생산과 소비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우리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가려 한다. 여기에는 살림의 논리, 상생(相生)의 논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쟁구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이룬 성공이 공정한 법칙에 의해서 이룬 것이 아닌 사람일수록 세상은 경쟁구도라고 강변한다.

반대로 세상살이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은 경쟁에서 졌다고 시인하는 자와 운이 좋이 않았다는 자가 있는데 이는 경쟁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고, 욕심과 살핌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경쟁의 끝은 죽음이다. 그 누구도 유익을 얻는 자는 없다. 다만 물질만능주의라는 우상이 유혹하는 순간의 쾌감을 탐닉하고 죽어가는 자와 억눌린 자의 신음 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3.결론 

  세계화가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통한 인류공동의 번영의 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경쟁'의 어원처럼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해 함께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을 인정하면서, 이제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재앙 등 세계적 재앙들을 방지하기 위해 지구촌 차원의 새로운 공동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규범에 합의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다.


   경쟁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21세기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프리쵸프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할 수 있다며 “발상의 전환,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머리를 굴려 계산해서 이득이 되는 일만을 하려는 약삭빠른 생활방식을 버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영성으로 아우르고 감싸 보살피는 사유태도를 배워 익혀야 한다.


  데레사 수녀는 “나눔 없이 평화 없다”고 하였다. 지금 지구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나누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나눔의 정신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같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인구폭발의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60억의 인구가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해법은 결코 경쟁의 논리, 죽임의 논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한 영성가들 에게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21세기를 예비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성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세계의 어느 종교도 이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쟁의 확산 내지는 고착화 하는데 역량을 쏟고 있다.

  

  비바람에 날아가고 있는 검은 우산을 좇아 달음질치는 한 사내의 그림 아래에 쓰여 진 글귀를 보자. "걱정 마세요. 막다른 골목이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어설픈 경쟁'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