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목사님이 제게 주신 글입니다.

두 아들 아빠 2005. 8. 31. 23:26
[두 아들 아빠께] 다니엘의 위로 2004/04/23
류황희목사

저는 성경에 다니엘이라는 사람만큼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니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자면,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물로서 참으로 신앙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당신님의 위대하심을 세상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면서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포로이긴 하지만 바벨론 본국의 왕실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바벨론의 관리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기본적인 전략은 점령지에 있는 지도자들과 인재들을 몽땅 끌어다가 본국이나 타지역으로 보냄으로써 반란의 씨앗을 미리 제거하고, 또 바벨론에 충성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바벨론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바벨론 이후에 들어선 정권들 속에서도 총리로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일제 시대를 겪은 우리 입장으로 표현하자면 일제의 관리가 된 일제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니엘과 일제 앞잡이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분명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사명은 지금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힘과 권력을 가진 바벨론 나라와 느부갓네살 왕(이스라엘을 정복한 왕)에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거기에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결국 이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앞에 무릎을 꿇고 '너의 하나님 만이 참 신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다니엘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현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바벨론의 포로 생활과 같습니다. 세상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기본적인 성향으로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수한 어려움과 환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은 심히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생동감있게 생각하기 위해서 당시의 정황을 한번 상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총리로 있을 때에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의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바벨론의 총리로 있는 다니엘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그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처단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요, 배신자라고 여겨지겠지만 오히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자신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지금 바벨론의 속국으로서, 포로로서 고통을 당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돌이키고자 뜻을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반란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하는 고통속에서 회개하고 참 신앙을 갖도록 요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란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보호를 자신들이 해야겠다는 불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0년 후에 회복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을 해주셨고, 선지자들도 그냥 '순순히 망해라'라고 예언했으며, 정확히 70년 후에 이스라엘은 회복되어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자유를 얻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같은 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다니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벨론은 역사적으로 아주 강력한 철권통치를 한 나라입니다. 아주 무자비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총리로서 그 나라를 아주 잘 이끌어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신앙적으로 고뇌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이 그의 사명인 것을 알았고, 다니엘의 사역을 통해서 바벨론과 세상에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이 드러났고, 나중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수도 있던 것입니다.(느부갓네살은 온 나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자는 그 집안을 멸하고, 그 집을 거름터가 되도록 하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양심과 다른 일들을 하도록 구조적으로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사는 것은 지구 상의 어느 누군가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다국적이며, 대기업의 사업으로 인하여, 나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으로 인하여 빈익빈 부익부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 어느 누군가는 살 소망을 잃어버려서 아이들과 함께 투신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산에 올라가서 살던지, 그냥 거렁뱅이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에 올라간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고, 거렁뱅이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있는 그대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 여기에 '서'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모두 알 수 없지만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곳 이 자리에서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전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종들아 너희 상전들에게 하기를 하나님께 하듯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종의 심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이런 구조속에서 나를 훈련시키시며 연단하고자 하심을 인정하고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열심히 사는 것만 하여서는 안됩니다. 현실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또한 나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내재적인 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할 수 있는대로 노력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잘 배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쓰면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라도 섣부르게 하나를 배우고는 그것이 전부인냥하여 마구 삶의 균형감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숙할 수 있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독립을 위한 투쟁과 열심을 냈다면 아마도 장렬하고, 처절하고, 멋있게 죽었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신 본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죽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불충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요,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저를 조금 알면 저를 굉장히 급진적인 개혁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급진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로 '다니엘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열심도, 헌신도, 희생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때로는 신앙적으로 결단을 요할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의 요구는 아무나 하도록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뛰어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고, 그러게 되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정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균형감"입니다. 그래야 선무당이 사람잡는 행동을 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