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양조장'군과 '정미소'양

두 아들 아빠 2006. 6. 5. 13:15
 

양조장과 정미소

다음카페 농업=생명 예술님의 사진 인용.


정미소는 이제 문학 작품에나 나오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이를 물래 방앗간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과거에 물래 방앗간의 도정과 일본식 정미소의 도정 방법은 달랐다. 일본식은 쌀을 더 많이 깍은 것이다. 현미에서 백미 수준으로 말이다.

정미소는 양조장과 더불어 과거에는 부의 상징이었다. 도정 수수료로 쌀 한 섬에 두 되 반을 챙겼으니 괜찮은 장사이다.

당시에 온 종일 날품을 팔아도 보리쌀 두어 되 박도 받지 못했으니, 당시로써는 엄청난 부였다. 8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리(里)단위까지 있어 전국에 2만개가 윗 돌았다. 이제는 농협의 대규모 도정공장에 밀려서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대부분 정미소는 마을 어귀 큰길가에 있다면, 양조장은 비교적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술 찌게미의 특유의 냄새가 나서 멀리서도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양조장 역시 돈푼깨나 만지는 업으로써 정미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공장 같은 정미소와는 다르게 기와지붕을 얻고 양반 흉내를 내려고 애를 썼다.

70년대 2481여개를 정점으로 현재는 996개 이다.

소주와 맥주의 대약진으로 막걸리의 매상이 86년을 정점으로 곤두박질 친 것이다.

많은 이농과 사람이 아닌 경운기와 콤바인이 농사를 대신하면서 말이다.

엄격한 공급구역으로 배타적인 독점권을 누리고, 밀주라도 만들다 걸리면 살림이 다 거덜 날 정도로 중대한 범죄행위에 해당되었고 이를 국가가 헌법만큼 적극 보호하였다.


동네잔치나 행사 때 막걸리 한 말을 내면 마이크로 이름을 불러서 칭송을 했다.

막걸리통은 당시에 물통으로도 각광을 받았는데 당시 그만큼 단단한 통이 없어 통 수거에 따른 실랑이가 많이 있었다.

허기를 달래주고 고단한 육체를 노곤하게 풀어주던 막걸리는 이제 맥주와 자장면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 전통의 막걸리가 사라진다고 안타까워하는데 실상은 그동안 국적 없는 혼혈 막걸리를 마셔 온 것 이었다. 바로 미국산 밀가루에 일본산 코오지 누룩으로 담은 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 정미소나 쌀가게, 식료품, 양조장, 포목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친일 일제 앞잡이라면 무리가 있지만, 많은 이권이 따르고 엄격하게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할 수 있는 양조장과 정미소는 일본 관리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허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자본가의 상당부분은 이렇게 매판 친일 자본으로 시작 되었다.

이들에게 이웃이 고통 받는 기근과 흉년은 오히려 자본을 더 축적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의 설립자 이병철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매년 연말과 연시를 일본에서 지내며 사업구상을 하였다고 한다. 혹여 일제시대가 그리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일제 시대의 사업 행태를 살펴보면,

이병철의 생가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시 북쪽에 있는 중교리의 대지주였다.

서울에서 수송학교를 중도에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의 놀음인 골패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다가 1926년 혼례를 올린 후 일본 유학을 가서 역시 중도에 그만두고 와서 아버지로부터 300석의 거금을 받아, 마산에 합천의 정현용, 박정원과 1인당 1만 원씩 출자하여 총 3만원의 자본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이후 트럭을 20대 구입하여 운수사업도 시작했다. 이때도 그 아비의 역할도 있었으리라.

당시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하자 김해 인근의 농토가 헐값에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그도 수탈 정책에 자의든 타의든 동참하였다.


논 한 마지기를 50원에 사서 소작을 주면 15원의 소작료가 들어오고 소작료에서 은행 이자 3원 50전을 빼고 세금 1원, 관리비 50전을 제해도 10원의 이익이 남는다. 그야말로 은행융자로 땅을 살 수만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논 한마지기를 소작하여 소작료를 15원을 내면 자신이 농사한 쌀을 팔아서 보리쌀이나 다른 것을 사서 연명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마산 식산은행의 하라다 지점장에게 뇌물을 주고 융자를 신청했을 것이고, 1년만에 연수 1만석,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병철은 27세에 경남 최대의 대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땅을 빼기다 시피 팔고 간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연변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것이다. 이렇게 이병철은 젊은 시절부터 우리민중을 수탈을 하는 방법을 써서 부를 축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꽃놀이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937년 3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터졌다.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이를 핑계로 일본 제국주의는 은행에 일체의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의 대출도 모두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시장경제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전답의 시세는 폭락했다. 은행 대출금을 모두 상환해야만 했던 이병철은 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전답을 서둘러 처분해야만 했다.

자신이 땅을 샀던 가격보다 싼 값에 팔아야만 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서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모두 팔아 대출금을 갚고 나니 그래도 현금 2만 원과 전답 10만 평이나 있었다.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남은 장사를 한 것이다.

 

자신은 머리를 썼다고 생각 했지만 결국 일본놈들에게 그동안 농민의 고혈을 짜서 일본은행에 이자를 꼬박꼬박 받쳐가며 놀아난 후 몽땅 털린 꼴이었다.

일장춘몽은 이루 두고 하는 말이다.(그다음은 이승만 정권과 6.25전쟁을 통해서 부를 쌓았고 이후 독재정권과의 정경유착으로 무수한 돈을 끌어 모았으나 여기서 더 이상 다루지 않겠다.)


일본관리에게 허가권을 따내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자기 자식의 공부를 시켰고, 이들은 일본의 관리가 되여 자신의 업이 계속이어지고 민중을 호령하기를 소원하였다.

이승만 정권을 이들을 초대 대한민국 정부의 근간으로 삼아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마산에 있는 일제 식산은행 터에 표석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 아직도 친일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

“이곳은 1907년 마산에서 ‘근대적인 은행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은행의 마산 출장소가 있던 자리이다.” 수탈의 근거지를 근대 은행의 효시라고?

(일본 제일은행은 뒤에 '식산은행'으로 통합했는데, '은행'이라는 이름을 쓰기는 했지만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형태였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은 주요 자리에 앉지도 못했고, 쉽게 말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이 일제강점기 최고의 강제수탈기관이었다.)

이병철은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잠시나마 최초로 큰 부를 가져다준 일본과 이 은행에 얼마 큰 향수가 있을까?

 

정미소와 양조장을 그저 추억의 뒤편에서 감상적으로만 생각 할 수 있을까?

(해방 이후에 이들 업에 종사하는 분들과는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