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보통아이 공부시키기 4. 공부!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나

두 아들 아빠 2006. 7. 19. 15:33
  내 글에서 세상적인 비법을 찾고자하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교육학자도 아니고 내 아이를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보아 성공적으로 키우고 있지도 못한(아직 다 크지는 안았지만..)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현 세태가 생각 없이 한 줄서기로 가는 것에 대하여 또 다른 이면을 살피고자 한다.


386 세대 중에 비교적 생활의 안정을 찾은 계층 중에 자신의 부모가 좀 더 교육에 신경을 썼다면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선구자적으로 자녀의 조기 유학을 선도 하고 있다. 도박판에서 조커를 내미는 것보다 더 극적으로 자녀의 교육환경의 판을 바꾼 것이다.



아주 끔찍스러운 것은 조기 유학의 당위성으로, 한국의 특성상 고등학교는 인맥을 쌓아야 하기 때문에 중학교 이전에 끝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이른바 ‘회귀성 유학’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뭐 물고기 떼도 아니고.. 암튼 이들의 영악스러움에 혀를 내 두를 지경이지만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세상을 섭리를 다 터득한 듯한 오만의 결과이다. 사람은 지나온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유추하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영어가 각광을 받는다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고의 예측 말이다.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나섬에 비장함까지 보인다.

인생은 비장함으로는 살아 갈 수 없다. 이는 사회의 변화와 관계성은 무시하고 자신의 열심이면 뭐든지 해결 할 수 있다는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이른바 ‘사’자 그릅에 속하는 우리사회의 주류라고 자청하는 부류 중에는 한 판 승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런 한 판 승부에서 성공을 검어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중에 많은 돈을 증권으로 날린 경우가 꽤있다.

자녀를 두고 또 다른 한 판 승부수를 거는 것이 조기 유학이다. 그래도 그들은 남다른 의식이라도 있지만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 뛴다는 식으로 동조하는 사람을 보면 돈이란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유용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한다.



평범한 아들을 둔 보통의 아버지는 이들이 건 승부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자녀 교육을 해야 한다. 이를 부러워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녀는 부모의 성향을 크게 벗어 날 수 없다. 이는 유전성과 더불어 후천적으로 공유된 환경 면에서도 그렇다. 창조주는 부모가 감당 할만한 이를 자녀로 보내신다.

아주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를 인간들은 ‘선택 받음’과 ‘시련 주심’으로 지레 속단한다. 이는 둘 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재앙’이다.

‘보통’과 ‘평범함’의 은혜를 따분하게 여기는 인간의 간악함을 스스로 느끼게 하려고 그 둘 다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다.



아들과 친밀한 관계는커녕 마치 원수지간까지 되는 경우는 아버지를 너무도 닮은 아들인 경우가 많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싫은 것이다. 잘 기억 해보면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운 것이다. 이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그 단점을 부모로부터 심각하게 비난 받은 영향이다. 일종에 대물림이다.



단점에 관한 원인과 객관적인 분석으로 고쳐가는 노력보다는 혼찌검으로 일관하면 부자관계는 영영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살부(殺父)의 심정은 어릴 적 오디프스 콤플렉스으로 시작하여 이런 문제로 완결을 본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공부를 하지 않거나, 반대로 복수하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 강심장의 아버지가 있을까?



공부를 좀 한다는 자녀를 둔 부모들 중에 아이의 천성적인 재능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채려는 부모가 있다. 자녀 모두가 공부를 잘 하면 이도 이해 할 수 있으나, 학업의 성취도가 현격하게 차이 나는 자녀를 두고 있다면 이를 뭐라고 설명을 할 것인가?

하나는 ‘선택 받음’이고 다른 하나는 ‘시련 주심’인가?



자녀 교육의 성공담은 좋은(?) 학교 진학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은 것으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교육방법을 답습하여 초등학교는 이렇게 공부를 시키라!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함은 우매한 짓이다. 왜냐하면 아이의 특성과 주어진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교과과목을 다 잘하는 학생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남의 자식 성공담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자기 자녀의 특성을 살리는 일과 부모도 모르는 자녀만의 특기를 살피는데 애를 쓰고 이를 지지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분야든 단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 마치 교육의 진리처럼 되었다.

대학 진학의 해택이나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삶을 단순하게 본 것이다.



축구부에 있다고 수업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선수는 이젠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이는 균형감의 상실이다. 축구선수 중에 기술은 뛰어났는데 뭔가가 부족하여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을 하는 선수가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2006년 월드컵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전술의 이해부족’이 이런 이유이다.

균형감은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온다. 축구 기술은 더디 발전했지만 대기만성인 선수도 있다. 무명의 선수를 발탁하여 훌륭한 선수로 키우는 축구 선진국의 감독들은 이를 잘 살피는 탁월한 눈과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부에 관한 착각 중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이다. 예전에는 그런 사례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신화였고 그 신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수석의 성적을 거두지 못해서 언론에 보도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신화를 일반론에 대입 시키는 것은 수학공부를 잘 못한 사람들이다.


공부는 환경이 중요하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또는 안방에서 볼륨 죽이고 T.V나 보고 있고 아이는 자기 방에서 공부만 하라면 안 된다.

자녀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공부에 접근하는 최초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