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보통아이 공부시키기 7. 사춘기 시절의 공부는?

두 아들 아빠 2006. 7. 21. 16:20
 (아들을 강하게 밀어붙이거나 자기 마음대로 조정을 하려는 어머니가 읽어야 할 글.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등교육을 받고, 생활이 좀 여유로운 대도시 어머니의 80% 이상이 해당 된다고 예측합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곧 잘 하던 아이가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갑자기 성적이 떨지는 경우는 사춘기 시절을 온전히 보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허겁지겁 학원과 공부방을 바꾸어도 소용이 없다.


개인적인 편차는 있으나 여자아이들의 경우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남자 아이들은 중학교나 더 늦으면 고등학교 때 오는 경우도 있다. (내 주변에선 마흔이 넘어서 오는 사람도 봤다.)

이 때를 부모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잘 보내야 한다. 이는 학업만이 아니라 인성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사춘기에 관하여는 ‘질풍노도의 시기’, ‘성의 억압’, ‘주변인’ 등등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큰아이를 키우며 살펴 보니, 사춘기 때는 아주 어린아이의 심성과 어른을 뺨치는 잔머리가 함께 담겨져 있는 시기라고 느꼈다.

이런 것이 한대 뒤엉켜 혼돈 그자체이다. 그래서 자신이 내야 할 카드를 뒤바꾸어 내기가 일수 여서 부모와 어른들부터 늘 책망을 받는다. 이후론 자신의 모습을 잘 들어 내지 않게 된다.

이를 부모들이 정리를 잘 해주어야 하는데 그시기를 놓쳐서 빨리 끝 낼 수 있는 사춘기를 몇 년씩 끌기도 한다. 아이는 그동안 억울함이 계속 쌓여가는 것이다.


학업성적은 꽤 좋으나 뭔가 억울함이 내제 되어서 그 눈빛부터 심상치 않은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명확히 모르고 그저 부모가 밀어 붙이니까 하는 것이다. 꼬인 심성을 살펴서 풀어주는 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머니 중에 사춘기 아들의 심성을 잘 살피지 못하고 대처하여 아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는 애처로운 엄마들이 요즈음 꽤 있다. 이는 물리적인 충돌을 말한다.

큰 충격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를 털어놓지 못한다.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털어 놓아도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이웃의 더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에게 마치 자신은 세상을 다 아는 듯한 말투로

“개똥 엄마! 애들 그렇게 잡지 마!  다 때가 있는 거야” 하는 정도이다.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시간을 끌다가 문제를 더 키우게 된다.


놀랍게도 이런 사실을 한 집안에 사는 아버지가 전혀 눈치를 체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아버지가 이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돈 잘 벌어오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이는 엄마가 덮어두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사실을 알면, 한 성질 하는 남편은 노발대발 할 것이고 결국 그 책임은 자신이 다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집구석에서 뭐하고 있었냐!’는 모욕적인 책망과 함께...


아들과 엄마는 암묵적으로 아버지가 있을 때는 평화를 유지하여 아버지는 퇴근을 하고 들어와 집안의 기류가 이상함을 감지 못한다. 좀 예민하게 살피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집안의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의 세심함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아들에게 한 번 당(?)한 엄마는 이후 아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아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학원으로 내 돌리게 된다.

이게 고부간의 갈등까지 이어짐을 예전에 ‘고부갈등’이라는 글에서 쓴 적이 있다.

부부가 한 몸으로 자녀 교육에 애써야 하는 이유이다.


어머니들의 착각 중에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어찌 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이다.

설령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조정대로 이끌려 올 줄은 몰라도 남자는 성장해서 한 가정을 이끌어 갈 독립적인 인격체이다. 언젠가는 호되게 당하게 된다. 그래서 사춘기 아들의 교육은 아버지가 나서야 한다. 이게 진정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버지의 이성적인 역할이다.


사춘기 시절의 학업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며, 억울함 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세상의 많은 엘리트들이 존재해도 뭔가 세상이 나아짐이 없는 것도 이들의 억울함 때문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글을 맺으면서


역사적으로 엘리트는 계속 길러져왔고, 탄생되었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많은 업적을 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 세상이 획기적으로 나아진 결과는 없다.


미래사회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엘리트의식에 빠진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향이다. 하지만 미래는 과거 산업사회의 패턴과 권위주의적인 사회로 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보화 시대와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되는 미래사회에서는 단 한번의 시험으로 평생을 보장 받던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법관과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등 이른바 ‘사’자 그릅의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무한 경쟁 시대로 돌입했다. 이제까지는 희소성을 유지하여 대접을 받으려고 시험 통과 숫자를 인위적으로 조정을 하였으나 이제는 희소성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따라서 ‘사’자 직업군에 관한 환상은 마땅히 버려야 하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상아탑(象牙塔)에서 우골탑(牛骨塔)이라는 혹평을 받으면서 양적으로 꾸준히 발전 해 왔다. 현재 국내에 대학이라는 간판을 단 학교가 358곳이 있고 대학생은 355만명이다. 이중 사립대학이 82%이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1%로 미국(63%)이나 일본(49%)보다도 훨씬 높다. 아무나 쉽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대학 숫자를 늘려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학 입학정원이 고교 졸업자 숫자를 넘게 됐고, 대학들은 수능성적도 필요 없다며 신입생을 아예 ‘유치’하러 다닌다.

외형 키우는 데만 골몰하다 보니 대학의 교원 1인당 학생수는 31명으로 고교(15명)의 2배를 넘게 됐다. 이 결과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유명대학의 값어치를 더 올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얼마 전에 물러 난 서울대 총장 정모씨는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권을 달라고 임기 내내 떼를 쓰다가 갔다. 이를 비판하는 세력이 없는 현실이 암울하다 못해 엽기적이라는 생각이다.


사회는 과거나 매래나 관계성 속에서 집단과 개인의 성장을 도모 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소수 엘리트의식은 집단화와 서열화를 조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왕족과 귀족의 대물림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분명 억압과 불공정함이 지지해 주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사회는 친일파의 득세와 연이어 군사독재 정부가 이를 획책 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를 용납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과거의 영광(?)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환상은 접어야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 수구와 개혁 세력간의 다툼이라고 하는데 기실 이 두 세력 간의 격돌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는 자명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가짜 민주주의 사회였다.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씌고, 뒤에서는 늘 음모와 협잡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통성과 정의가 없는 권력은 늘 그렇게 음험함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구도를 깨려는 신진 세력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이들 신진 세력은 의식이 앞서 있으며 보복을 원치 않는다.

보복이란? 비슷한 의식 수준의 집단간에 물리적인 힘이 쏠려 있는 편에서 행하는 ‘야만적인 수단’이다. 수구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으나 서서히 무장을 해제 당하고 있다. 아니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

 

(추가 입니다. 올바른 자녀 교육은 가정에서 애를 쓴다고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계가 분명 있지요. 우리사회가 정의롭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