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의 왜곡! 일본인의 눈으로 쓴 우리근대사.

두 아들 아빠 2006. 7. 24. 19:11
 

우리나라 근대사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을 꼽으라고 하면?

내 경우는 단연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10월8일)이다.

 

다음은 시해에 참여한 일본 낭인 고바야카의 증언 글입니다.

 

"우아한 용모의 여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우리는 왕후의 침실인 옥호루에 난입했다. 겁에 질린 여자 10여 명이 떨고 있었고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얼굴도 보였다. 도주하려는 이 경직을 살해했다. 그러고는 울


부 짖는 여자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칼날을 가슴에 대고 왕후의 소재를 물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르는 그들은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이에 우리는 복장과 용모가


우아하여 왕후라고 생각되는 부인 3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왕후의 용모를 알지 못


하는 우리는 놓쳐버린 것이라 속단하고 마루 밑가지 들어가 찾아보기도 했다.


다시 한 여자를 끌어내 칼을 갖다대고 협박하자 그녀는 왕후의 볼 위에 한 점 얽은


자국이 있다고 했다. 이에 피살된 여자들의 시체를 다시 점검하니 과연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시체가 발견됐다. 이 시체를 몇 명의 궁녀에게 확인시킨즉 모두 왕후가


틀림없다고 했다. 왕후는 아직 잠자리에서 나온 그대로 였는지, 상체에는 짧고 흰 속


적삼을 입었을 뿐이었고 반쯤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허리로부터 아래로는


흰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역시 다리 아래로는 하얀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가냘픈 몸매에 후순하게 생긴 얼굴과 흰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


섯 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실제 나이 44세). 이 가냘픈 손으로 조선 팔도를 움직


이며 호걸들을 조종했던가. 이마 위에 교차돼 있는 두 줄의 칼날 자국이 치명상인 듯


했다. 시체를 홑이불로 싸서 수풀 속으로 운반하여 석유를 끼얹고 장작더미를 싸 얹은


다음 불을 질렀다.



영화 ‘한번도’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죽음을 앞두고 황후의 당당한 모습은 너무 미화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일이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김 구 선생도 비분강개(悲憤慷慨)를 하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같은 해에 사건에 연류가 의심되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그 피를 받아 마셨다. 그의 나이 21세었다.

 

먼저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경복궁 중건 사업을 맹비난하여 당시의 위정자의 잘못으로 침략을 불러 왔으며 힘이 없으면 당해도 싸다는 야만적인 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자괴감과 지도층에 관한 끊임없는 불신과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아직까지 톡톡히 보고 있다.


세계사에도 그 유래가 없는, 일국의 황후를 야심한 시간에 궁궐침소에서 살해한 천인공로 할 짓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기 위해서 우선 민씨 일가의 족벌 정치를 사정없이 까야한다.

우리의 뇌리 속에 민비의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일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본이 그녀를 살해 한 목적으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똑똑한 황후라 할지라도 엄연히 고종황제가 있는데 여인네가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다만 정치적 조언자였을 뿐이었다.

이는 일본인 밑에서 역사를 배우고 가르친 친일 역사가들의 획책이다.

설사 그런 주장이 맞다고 해도 살해의 이유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우리 측 기록은 전무한 것을 보면 당시 일본과 친일파는 철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것 같다. 황후의 사진 한 장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겨우 전해지는 것이 일본 측 민간 자료와 일등영사가 사건 두 달 후에 일 천황에게 보고한 ‘조선왕비 살해 일건’ 그리고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가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한 일명 ‘웨베르 보고서’는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이 보고서의 마지막은 이런 글로 맺었다.

"전쟁도 아닌 평상시에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추악한 만행이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 고종황제였다.

고종황제는 자신의 아내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세계에는 ‘닌자’라는 정적을 암살하는 임무를 받은 자들이 있다.

암살 대상자를 살해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고 믿어온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이는 그들 세계에서 가장 악날하고 참혹한 보복의 수단으로도 자주 이용되어왔다.

그래서 명성황후를 살해 한 것이다.


살해범으로 지목된 자들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조작된 조선인 범인이 잡혔다는 것과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이들은 기차로 도쿄까지 오는 연변에서 일본인들의 박수를 받고 도착 후 천왕이 시종대신을 보내서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억울한 재판을 받아서 인가?

 

두 발의 원자폭탄 중 하나가 히로시마에 떨어 진건 우연일까?

명성황후가 죽은 후 50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1895~1945)

나가사끼는 7만명 히로시마는 14만명이 죽었다.

일본은 이제 히로시마를 ‘평화의 도시’로 부르고 있으니 암튼 끝내주는 족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