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중년의 삶! 먼저 순수로 돌아가야

두 아들 아빠 2012. 10. 15. 22:18

성선설, 선악설을 떠나 어린아이들이 순수하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그냥 '유치'(幼稚)다. 거기다 뭘 자꾸 갔다 붙이는 건 좋지 못하다. 아이는 그저 아이 다워야 하고 그렇게 봐주고 훈련과 배려를 균형있게 해주어야 한다. 억지로 설정한 것이지 아이와 어른의 중간 단계 따위는 애초에 없다. 사춘기 또는 청소년기라고 하는데 이 또한 계층을 만들어 억압의 한 방편일 뿐이다. 수태가 가능하면 모두 어른이다. 같은 시기에도 분명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아이와 어른의 구분 중에 수태 다음으로 '책임의식'이다. 그렇게 전제하면 혼전은 아이스러움이 더 많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혼인을 한 모든 사람이 어른이라는 말은 아니다. 책임의식이 현격히 떨어지는 사람도 많다.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중년의 삶이 뻐그러지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순수로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뻐지지 않으려면' 이라는 단서다. 잘 되려면 먼저 나뻐질 수 있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딴에는 순수해지려고 했다가 더 뻐그러진 경우도 있다. 정말 그랬다면 그건 순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순수가 무엇인지 망각했기 때문이고

예를 들어 중년에 애틋한 사랑을 꿈꾸 짓은 순수가 아니고 불륜다. 그건 젊은 시절,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일생에 단 한번 느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순수란 순결한 지고지순(地高至純)만을 말하지 않는다. '순도 높음'과 '정결',  '원칙에 입각함'도 순수에 포함하고자 한다.

순수 자체는 불완전하고 때론 위험하지만 순수가 바탕되서 행동에 나서면 나름 힘을 발휘한다. 비유하고 싶지 않지만 예전에 정치인 이정희가 잠시 그랬다. 순수와 행동의 결합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 '균형'이 있어야 한다.

 

인격자의 균형이란 어디도 쏠리지 않는 시소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의식과 배려가 함께 있어야 한다. 순수한 척 행동한 이정희는 균형감 부분에서 현격히 떨어졌기에 들통이 났고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균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칙'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한다. 부정선거를 '부정하다' 고 말해야 하며 폭력을 눈감아서는 안 된다. 이정희는 나름 억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베푼 선과 덕이 인간이 저지른 죄를 사할 수 없다.

 

중년은 그동안 살아오면 알게 모르게 억울함이 쌓여 있을 수 있다. 이를 치유 해야 하는데 대게 자가 치유 방법은 '망각'이다. 중년 여성들의 심한 건망증이 대표적이다. 망각은 둔감으로 시작하여 불감으로 달린다. 그래야 완전한 망각으로 들어 설 수 있다. 순수로 회복은 먼저 자연과 동화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가치'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따라주어야 완성도가 높다.

 

일자리에서 쫓겨나 산을 해메는 짓은 자연과 동화되는 것 아니라 내버려진 아이가 길을 헤메다 산으로 간 일이다.(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산업화는 경쟁의 효율에 의해 급격히 도시화를 이루고 도시는 근본적으로 자연을 회피하고 거스르는 공간이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맨땅을 밟는 평면은 아주 제한적이고 거긴 인공적 자연인 공원을 제외하고 대게 지저분한 곳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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